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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사적,기념관

태종의 증오심으로 빚어진 광통교

국력이 광대하게 뻗어 나가라는 뜻의 광통교는 청계천에서 가장 중요한 다리로서, 
청계천 다리 중 가장 많은 소통을 담당하고 있었다.
도성 밖에서 남대문으로 들어와서 곧장 직진하면 광통교에 이르기 때문이다.
1410년 홍수로 청계천 다리가 떠내려가자, 태종은 신덕왕후 무덤에 있는 
병풍석을 가져와서 다리를 만들라고 명했다. 
백성들이 밟고 다니는 다리에 왕비의 무덤에 있는 돌을 쓰게 한 것이다. 
고인의 무덤을 훼손한 것으로도 모자라 병풍석마저 백성들이 밟고 다니게 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리가 지금 청계광장을 기준으로 두 번째 다리인 청계천 광통교다. 
원래 현재의 광교 자리에 있었으나 교통편의를 위하여 현대식 교량(광교)을 건설하고 
상류 쪽으로 150m 옮겨 이전 복원하게 되었다.

청계천 다리 현황도.

1410년(태종 10) 신덕왕후(태조의 계비)의 옛 무덤 터에 있던 돌을 옮겨 와 
세운, 도성 최대의 다리로서 어가와 사신 행렬이 지나가는 주요 통로이자, 
다리밟기, 연날리기 등 민속놀이를 하는 장소였다. 
교대에는 신덕왕후 무덤 주위의 돌에 새겼던 정교한 조각들이 남아있으며, 
교각에는 여러 시기에 걸쳐 개천을 고친 기록이 새겨져 있어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다. 
1910년 전차 선로가 다리 위에 놓이면서 크게 훼손된 바 있으며, 
1959년에는 청계천 복개공사로 도로 밑에 묻혔으나, 
청계천 복원하면서 2005년에 지금의 위치에 옮겨 세웠다.
다리 위는 대부분 청계천 복원 때 새로 만든 것들이지만 아래는 비교적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석주위의 해태상에 다리부분이 보수된 흔적이 남아있다.

석주와 기사대준.(기사년에 준설한 것을 말함)

▶동자석주

동자석주는 석주와 석주 사이를 잇는 죽석이라고 하는 긴 돌을 중간에 받쳐주는 작은 석주다.

다리 교각과 난간으로 사용된 동자석주를 보면, 
1410년(태종 10) 처음 돌다리를 세울 때 사용했던 동자석주와
2005년 청계천 복원시 새로 다듬어진 석물이 함께 어우러져 
세월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준다.

▶난간석주

봉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 둘레에 울타리처럼 세우는 12개 석주로
죽석과 죽석을 잇는 중심 석물이다.

하나은행 후원석.

광통교 좌, 우의 모습.

광통교를 알리는 동판.

광통교 남쪽으로 인도가 덧대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청계천 너비와 광통교 길이가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생긴 현상이라고 한다.

왕릉을 지키던 용감한 석물들은 이곳에서 하수의 물방울을 뒤집어쓰고 
오물 냄새에 둘러싸인 채로 600여 년을 지하에 묻혀 영구히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힐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을
1958년에 청계천 복개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광통교 속에 
신덕왕후 강 씨의 능침석들이 있음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아버지 이성계가 살아생전 정성을 들인 곳이 정릉과 흥천사다. 
아버지 손때가 묻어있고 흔적이 남아 있는 정릉을 헐어 낸다는 것이 불효인 것을 알면서
정릉이 도성에 있는데도 영역이 너무 넓으니 백성들의 원망이 많다는 이유로
오늘날 중구 정동에 있었던 것을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장시키고
정동의 구기 터에 남아있던 병풍석과 석물은 옮겨와 돌다리로 만든 것이
오늘날 청계천 광통교다.

태조는 조선 건국 이후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 씨의 다섯 아들들을 제쳐두고
신덕왕후 강 씨의 막내아들 방석(의안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한 씨 아들 특히, 방원(정안군)과의 충돌이 잦았다.  
이로 인해 둘 사이에는 감정에 골이 깊어만 갔고, 그 결과 1차 왕자의 난으로 이어진다.

 

▶제1차 왕자의 난

1398년(태조 7) 8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으로
조선 건국의 최대 공신인 정도전, 남은 등이 왕실의 힘을 약화시키고 
유교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왕실 권력의 기반인 사병을 혁파하려 하자 
수세에 몰린 방원은 한 씨 소생 왕자들과 함께 1398년(무인년) 8월 25일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등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살해하였다. 
이때는 이미 신덕왕후 강 씨는 2년 전 (1396년)에 두 아들 죽음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이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방원의 난, 무인정사의 난, 또는 정도전의 난이라고 한다.
그 후 이방원의 뜻에 따라 둘째인 방과가 정종이 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정종과 그의 정비 정안왕후 사이에 소생이 없자, 
세자의 지위를 놓고 방원(다섯째)과 방간(넷째)은 또다시 미묘한 갈등에 싸였다. 
이때 공신 책정문제로 방원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박포가 방간을 충동질하여 
1400년 1월 방원과 방간 사이에 무력충돌이 일어났고, 
개경에서 벌어진 싸움은 수적으로 우세한 방원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으로 방간의 난 또는 박포의 난이라고도 한다.
그 후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태종이 되었다.

庚辰地平(경진지평) : 경진년 1760년(영조 36) 때 땅을 평평하게 한 것을 말한다.
癸巳更濬(계사경준) : 계사년 1833년(순조 33) 때 다시 땅을 판 것을 말한다.
己巳大濬(기사대준) : 기사년인 1869년에 크게 준설사업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면석

열두 개의 면석을 둘러 봉분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실질적으로 방지하는 기능을 한다.

▶우석

면석을 12면으로 구성하기 위해 꺾어진 부분에 끼어 넣는 석물이다. 

▶​금강저

진언을 외울 때 휴대하는 의식용구로,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모든 악마를 물리치고 
지혜광명을 발현시킨다는 상징성을 지닌 도구이다.

광통교 아래 벽에는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돌이 박혀 있다.
이들은 정동의 구기 터에 남아있던 병풍석과 석물들을 옮겨와 돌다리로 만든 것들이다.

면석에 합창한 수관인신상의 모습이 거꾸로 설치하기도 했다.
한 나라에 임금의 잘못된 증오심으로 비어진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수간인신상

면석에는 12 간지에 해당하는 동물을 새긴 모자인 수관을 쓰고 있는 사람의 형상을 새겨 넣는다.
능에 따라서 수관인신상을 새기지 않거나 모란을 새긴 능도 있다.

다리를 지탱하는 주춧돌과 다리 상부의 모습이다.

현재는 다리를 떠받드는 석재이지만, 과거의 영화를 말해주듯
병풍석의 구름모양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이는 태조가 신덕왕후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 했는지 석물의 조각을 
제주목사 여의손으로 하여금 일류 석공들을 상경시켜 감독, 조각하였다고 한다.

600년이 지난 석물이 다리를 지탱하고 있다.

광통교 전경.

 

600년 이상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서 깊은 광통교이지만 ,
그 이면에는 한 나라에 임금의 잘못된 증오심으로 빚어진 어처구니없는
비밀이 숨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때 친어머니처럼 따르던 그가 배신과 분노로 백성들의 발길에 무참히 짓밟히기를
바라듯 능의 석물로 다리를 만든 것은 효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다.
이처럼 광통교는 조선의 역사를 담아내는 곳으로 두고두고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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