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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정릉과 숲길

정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두 번째 왕비 신덕황후 강 씨의 능이다. 
1396년(태조 5) 신덕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취현방(현 서울 중구 영국대사관 근처)에 
정릉을 조성하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만들었다. 
그러나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집을 짓는 것을 허락하였다. 
1408년(태종 8) 태조가 세상을 떠난 후 다음 해(1409년) 정릉이 도성 안에 있는 것이 
예에 어긋난다 하여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장시켜 버렸다.

[정릉 가는 길]
우이경전철 정릉역 2번 출구에서 아리랑시장 방향 도보 15분.
4호선 성신여대입구 6번 출구에서 성북 22번 마을버스
또는 1012, 1211번 버스이용 정릉입구 정류장 하차 후 아리랑시장 방향 도보 15분.

[관람요금]
대인(만 25세~만 64세) : 개인 1,000원
지역주민(성북구) : 50% 할인(신분증 제시)
매월 마지막 수요일(문화가 있는 날) : 무료

[주차요금]
무료 (약 10대 정도)

[정릉 매표 및 관람 시간]
2~5월 / 9~10월
매표시간 09:00~17:00
관람시간 09:00~18:00

[6~8월]
매표시간 09:00~17:30
관람시간 09:00~18:30

[11~1월]
매표시간 09:00~16:30
관람시간 09:00~17:30

 

정릉을 가기 위해서는 우이경전철 정릉역 2번 출구로 나온다.

나오면 정면으로 이정표가 길을 안내한다.

약 200m 정도 올라오면 사거리 좌측으로 이정표가 있다.

사거리에서 좌측 직진으로 올라오면 정릉 입구가 보인다.

정릉 종합 안내도.

매표소를 지나 펼쳐진 모습이다.

정릉은 1970년 5월 26일부로 사적 제208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왕릉 유네스코등재 기념비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조선왕릉 40기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00여 년간 이어진 왕조의 능이 단 한 곳도 훼손되지 않고 모두 남아있다는 점과 
조선왕릉의 높은 문화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2009년 6월 30일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금천교

왕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으로 들어가는 다리로 
금천교를 건너면 성스러운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같게 된다.

조선 왕릉과 궁궐에는 금천의 역할을 하는 물줄기가 있다.

금천교를 건너 홍살문으로 이동한다.

▶홍살문

홍살문은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 지붕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운 형태로, 
중앙에는 삼 태극무늬가 있다.

정릉 상설도.

▶신로와 어로

참도는 혼령이 이용하는 신로(향과 축문)와 참배자(왕 또는 제관)가 이용하는 어로로 구분된다. 
좌측의 신로가 능의 주인인 신이 다니는 길로 우측의 어로보다 약 10센티미터 정도 높고 넓다.

▶참도

홍살문 앞에서 정면의 정자각까지 얇은 돌을 깔아 만든 긴 돌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참도라고 한다.

▶판위

제사 때 제관과 초헌관이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공간.
조선왕릉은 우측에 있으나 황제릉의 판위는 좌측에 자리 잡고 있다.

▶정자각

능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중심 건물이며,
위에서 보면 제수를 진설하는 'ㅡ'자 모양의 정청과 제향을 드리는 'ㅣ'자 모양의 배위청이 
합쳐진 모습이 '丁'(고무래 정) 자 모습이라 정자각이라고 한다.
정전 3칸에 배위청 2칸이 덧붙은 5칸으로 되어 있다.

참도는 한 번 꺾여 정자각 동쪽으로 이어진다.

▶정자각 계단

정자각 계단은 정면에 두지 않고 측면에 만들었다.
이는 해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떠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섭리를 
건축물에 활용한 것이라고 한다.

왼쪽 신계 : 신이 오르는 계단. 
오른쪽 어계 : 제를 올리는 왕과 왕세자가 오르는 계단.

▶수복방(守僕房)

정자각을 중심으로 좌측에 수복방과 비각이, 우측에는 수라간이 있다.
수복방은 능을 지키는 수복(守僕)이 근무하는 건물로
2칸짜리 맞배지붕 집이다.

▶비각

왕의 행적을 적은 신도비나 표석을 보호하는 건물.

▶표석 

비각 내 표석에 비문으로 '대한 신덕고황후 정릉'이라고 적혀 있다.
원래 표석에는 '조선국 신덕왕후 정릉'이라고  쓰여 있었으나 
대한제국 고종 때 황후로 추존되면서 기존에 쓰인 표석을 갈아서 고쳐 썼다고 한다.

▶수라간

제향을 지낼 때 음식을 덥히는 곳.

▶정천

정청 내부에는 제수를 진설하는 제상(祭床)과 신이 머무는 신어상(神御床)
제향 시 술과 술잔을 올려놓는 준소상등이 있다.

▶서쪽 정자각 계단

제례를 마친 제관들이 계단을 내려와 북서쪽에서 제례를 끝낸다는 의미로 
지방을 불사르고 제물을 예감에 묻는다.

▶소전대

소전대는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이곳 정릉(신덕왕후)과 태조의 건원릉(이성계), 
태종의 헌릉(이방언)에만 있고, 이후에는 소전대가 사라지고 예감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신로

제향을 받은 혼령은 신문을 나와 신로를 따라 능침으로 돌아간다.

정자각 전경.

▶추녀마루 위에 용두와 잡상

일반적으로 맨 앞에 놓이는 선인을 포함해 10여 종의 잡상이 만들어지는데, 
건물의 위엄을 더하고 화재나 액을 막아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잡상

잡상은 모든 기와지붕 위에 설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궁전건물과 궁궐과 관련이 있는 건물에 한정된다. 
또한 궁전건물 중에서도 양성으로 되어 있는 내림마루와 귀마루(추녀마루)에만 배치되고 
기와로 마감된 지붕마루에는 설치하지 아니하였다. 
잡상이 설치되어 있는 건물로는 궁궐의 정전, 왕의 침전, 궁궐의 정문, 
도성의 성문, 궁궐 안의 누정, 왕릉 왕비릉의 정자각, 종묘, 성균관, 동묘 등에 한정되며 
민가, 사원, 서원, 지방향교 등에는 잡상을 설치하지 안 했다고 한다.

정릉은 원래 오늘날  중구 정동에 있었던 것을 태종이 태조 사후에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장시켜 버렸다.
마지막으로 능에 사용되었던 12 지상들은 땅에 묻어버렸고 
병풍석들은 청계천 광통교의 돌다리로 사용해 물속에 거꾸로 처박아버렸다.
그리하여 능침 석물 중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만 옛 정릉의 석물이고 
나머지는 현종 대에 다시 만든 석물이다. 

태조의 가계도.

▶신덕고황후

신덕황후 강 씨는 본관이 곡산인 상산부원군 강윤성과 진산부부인 강 씨의 딸로 태어났다. 
신덕황후는 태조의 경처(고향에 본처를 두고 서울에서 결혼한 부인)가 되어 
2남(무안대군 방번, 의안대군 방석) 1녀(경순공주)를 낳았다. 
신덕황후의 집안은 고려의 권문세가로서 태조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세력을 키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의 향처 한 씨(신의황후)가 이미 조선 건국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신덕황후가 조선의 첫 왕비(현비)가 되었고,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다. 
그러나 이 일은 후에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1396년(태조 5) 이득분의 사저에서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시호를 신덕왕후라 하고 
정릉을 조성한 후 정릉 옆에 흥천사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태조는 신덕왕후를 극진히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을 싹 틔우게 된 계기에 대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호랑이를 사냥하던 무사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다.
마침 우물 가에 있던 여인에게 물 한 바가지를 부탁했다. 
여인은 물이 담긴 바가지에 버들잎 하나를 띄워 무사에게 건넸다.
무사는 버들잎을 띄운 이유를 묻자 “차가운 물을 급하게 드시면 탈이 날 수 있으니, 
천천히 드시라고 버들잎을 띄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여인의 현명함에 감탄한 무사는 태조 이성계이고, 여인은 신덕왕후 강 씨로 전해진다. 

이성계 본처 한 씨(신의왕후)는 아들 여섯을 낳고 조선개국(1392) 1년 전인 
55세로 병사하여 왕비가 되어보지도 못하고 사망하고, 둘째 부인 강 씨(신덕왕후)는 
고려 말기 권문세족의 배경하에 이성계의 둘째 부인으로 공식적으로는 
조선 초대 왕비가 되고 두 아들 (방번, 방석)을 낳고 태조의 총애를 독차지한 
막내아들 방석이 세자 책봉까지 결정되니 여기서부터 왕자의 난이 시작된다.

▶제1차 왕자의 난

1398년(태조 7) 8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으로
조선 건국의 최대 공신인 정도전, 남은 등이 왕실의 힘을 약화시키고 
유교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왕실 권력의 기반인 사병을 혁파하려 하자 
수세에 몰린 방원은 한 씨 소생 왕자들과 함께 1398년(무인년) 8월 25일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등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살해하였다. 
이때는 이미 신덕왕후 강 씨는 2년 전 (1396년)에 두 아들 죽음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이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방원의 난, 무인정사의 난, 또는 정도전의 난이라고 한다.
그 후 이방원의 뜻에 따라 둘째인 방과가 정종이 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정종과 그의 정비 정안왕후 사이에 소생이 없자, 
세자의 지위를 놓고 방원(다섯째)과 방간(넷째)은 또다시 미묘한 갈등에 싸였다. 
이때 공신 책정문제로 방원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박포가 방간을 충동질하여 
1400년 1월 방원과 방간 사이에 무력충돌이 일어났고, 
개경에서 벌어진 싸움은 수적으로 우세한 방원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으로 방간의 난 또는 박포의 난이라고도 한다.
그 후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태종이 되었다.

1차 2차 왕자의 난을 직접 보고 겪은 태조 이성계는 지기 자식들의 
골육상잔을 지켜보며 탄식한 글이 태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있다.
'내가 젊었을 때 어찌 오늘날이 있을 줄 알았으리랴, 
다만 오래 살기를 원하였더니 이제 70이 지났는데도 죽지 않는다.'
태조의 비통한 심정이 그대로 녹아 있는 글이다.

물론 태종은 신덕왕후를 태조의 왕비로 인정하지 않을 만큼
둘 사이에는 감정에 골이 깊은 것은 사실이다.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 씨가 잠들어 있는 정릉은 태종 이방원에게 눈에 가시었다. 
아버지 이성계에게는 잊을 수 없는 여인이었지만 이방원에게는 원한이 맺혀있는 여인이었다. 
이복동생 방석을 세자에 앉히고 방원으로 하여금 시름을 삭이며 야인생활을 하게 했던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정릉의 능침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이 있고 석양과 석호는 1쌍씩 배치하였다. 
이는 1410년 홍수로 청계천 다리가 떠내려가자 태종은 신덕왕후 무덤에 있는 
병풍석을 가져와서 다리를 만들라고 명했다. 
백성들이 밟고 다니는 다리에 왕비의 무덤에 있는 돌을 쓰게 한 것이다. 
고인의 무덤을 훼손한 것으로도 모자라 병풍석마저 백성들이 밟고 다니게 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리가 청계광장을 기준으로 두 번째 다리인 청계천 광통교다. 

정릉의 장명등은 고려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왕릉 중 가장 오래된 석물이다. 

다시 한번 능을 뒤돌아보며 숲길로 넘어간다.

능 옆으로 편안한 숲길과 함께 화장실도 조성되어 있다.

숲길은 2개 숲길로 나뉘며 첫 번째는 약 10분 정도 소요되는 0.37km의 참나무 숲길과
40분 정도 소요되는 1.44km의 팥배나무 숲길이 있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1.44km의 팥배나무 숲길이고
왼쪽이 참나무 숲길로 약 10분 정도 소요된다.

팥배나무 숲길로 쉬엄쉬엄 걸어가기로 한다.

한동안 소나무길이 이어진다.

큰 비늘처럼 벗겨져 회백색을 나타내므로 백송이라고 한다.

▶백송

소나무이면서 하얀 껍질을 가지고 있어서 백송 또는 백골송이라 한다. 
높이는 15m, 지름은 1.7m에 달하며 굵은 가지가 많이 발달하고 수형이 둥글게 된다.
어릴 때의 자람이 대단히 느리고 이식력이 약한 편이다. 
중국원산으로 추위에 견디는 힘이 강하다. 
우리나라에 일찍이 도입되었으나 번식력이 약해서 그 수가 매우 적다.

▶팥배나무

배나무 꽃과 닮은 꽃이 피고, 팥알 같은 열매가 열린다 하여 팥배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큰 키나무로 키가 10m~15m 정도 자라며, 꽃은 4월 말에서 5월에 핀다.
겨울에 산새들이 팥배나무 열매를 먹이로 이용하며 꽃말은 '매혹'이다

비탈진 길은 푹신한 야자 매트를 깔아 놓았다.

약간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된다.

가는 길에 새들의 청아한 소리가 들려온다.
제각기 내는 소리와 향기, 빛깔은 다르지만, 그들만의 살아가는 방법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숲 속의 쉼터는 않자 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다.

숲사이로 도시의 풍경이 빼꼼히 인사를 나눈다.

재실로 넘어가는 길이다.

계단을 내려서면서 정릉의 재실을 만나게 된다.

재실 전경.

재실 입구에는 수령이 350년의 보호수로 지정된 높이 21미터의 큼지막한 느티나무가 서 있다.

정릉의 재실은 문을 2개를 지나면 나오고 
첫 번째 문을 지나면 행랑채와 신덕황후 도서관이 조성되어 있다.

소실된 정릉 재실은 터만 남아있던 것을 2012년에 발굴조사 하여 2014년에
복원되었으며 일부공간을 전통교육 및 도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도서관 양쪽으로 관람객들이 담소를 나눌 수 있도록 조성된 버들잎방과 빗물방이 있다.

재실 도서관.

창고와 집사방이 있는 행랑채.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재실 본채

정면 6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능을 지키는 능참봉의 거처이자
능 제사를 준비하던 공간이다.

제기고와 재실 본채.

정릉을 나오며 살짝 욕심이 생긴다
이성계가 정릉에 묻힌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사찰이
흥천사라 하는데 과연 흥천사는 어떤 곳인지 궁금해진다.
그래서 가보기로 했다.

신덕왕후의 원찰로 알려진 흥천사가 300m 거리에 있어 가보기로 했다.

정릉을 나와 골목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도로가 옆으로 기와집이 보인다.
이곳이 흥천사 사찰 뒤편에 있는 구립 흥천어린이집과 느티나무어린이집 두 곳의 어린이집이 있다. 
두 곳 모두 성북구에서 건립한 공립유치원이고 흥천사에서 어린이집 부지를 제공했으며 
서울시에서 최초로 세워진 한옥 양식의 어린이집 건축물이기도 하다.
어린이집 주차장 옆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홍천사 바로가기 : https://126sd.tistory.com/

 

광통교 바로가기 : https://126s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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