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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의릉과 천장산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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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선의 20대 왕 경종과 왕비 선의왕후가 잠들어 있는
의릉과 의릉 숲길을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녀왔다. 

[의릉 가는 길]
지하철 6호선 돌곶이역 8번 출구 도보 800m.
청량리역 환성센터 120, 147, 216번 이용 의릉입구 하차 도보 5분.

[관람요금]
대인(만 25세~만 64세) : 개인 1,000원
지역주민(성북구, 동대문구) : 50% 할인(신분증 제시)
매월 마지막 수요일(문화가 있는 날) : 무료

[주차요금]
무료

[의릉 매표 및 관람 시간]
2~5월 / 9~10월
매표시간 09:00~17:00
관람시간 09:00~18:00

[6~8월]
매표시간 09:00~17:30
관람시간 09:00~18:30

[11~1월]
매표시간 09:00~16:30
관람시간 09:00~17:30

 

지하철 6호선 돌곶이역 8번 출구로 나와 직선으로 올라간다.

지하철 6호선 돌곶이역 8번 출구로 나와 올라가면서
3번째 횡단보도에서 좌측으로 들어서면 된다.

현대자동차 화랑로 지점 건물에서 좌측으로 들어선다.

우측으로 의릉 푯말이 서 있다.

좌측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전경.

파란 선을 따라 직선으로 800m 정도 걸어간다.

올라가면서 우측 담장에 의릉의 석물들을 그려놓았다.

의릉 푯말이 시야에 들어온다.

우측길은 의릉 매표소 방향이며 
좌측길은 천장산 하늘길을 갈 수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별관 길이다.

의릉으로 가기 전 의릉 역사문화관을 먼저 가보기로 한다.

이곳은 의릉에 관한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역사관 전경.

경종과 선의왕후 능에 조성된 석물을 비교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시대별 석물의 변천사.

▶의릉 

의릉은 조선 20대 경종과 두 번째 왕비 선의왕후 어 씨의 능이다. 
의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위아래로 조성한 동원상하릉의 형식이다. 
의릉은 1724년(경종 4)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 양주 중랑포 천장산 언덕인 
현재의 자리에 조성되었다. 
이후 1730년(영조 6) 선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의릉 아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의릉 매표소와 전경.

▶조선왕릉 유네스코등재 기념비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조선왕릉 40기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00여 년간 이어진 왕조의 능이 단 한 곳도 훼손되지 않고 모두 남아있다는 점과 
조선왕릉의 높은 문화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2009년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의릉은 사적 제20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의릉과 천장산 숲길 안내도.

매표 후 안으로 들어선 전경이다.

▶금천교

제일 먼저 금천교가 시야에 들어오며 이곳 금천교는
왕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으로 들어가는 다리로 
금천교를 건너면 성스러운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같게 된다.

금천교를 지나 홍살문과 정자각이 차례로 펼쳐진다.

1962년에는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가 의릉 경내에 들어서면서
정자각 앞에 참도를 기준으로 양옆은 인공 연못을 만들어 정원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1995년에 중앙정보부가 이전하면서 능역을 점차 복원하였다.

▶홍살문

홍살문은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 지붕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운 형태로, 
중앙에는 삼 태극무늬가 있다.

▶신로와 어로

참도는 혼령이 이용하는 신로(향과 축문)와 참배자(왕 또는 제관)가 이용하는 어로로 구분된다. 
좌측의 신로가 능의 주인인 신이 다니는 길로 우측의 어로보다 약 10센티미터 정도 높고 넓다.

▶참도

홍살문 앞에서 정면의 정자각까지 얇은 돌을 깔아 만든 긴 돌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참도라고 한다.
참도가 끝나는 곳에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만나서 제향을 드리는 정자각이 있다.

▶판위

제사 때 제관과 초헌관이 예를 갖추어 서있는 자리로
조선왕릉은 우측에 있으나 황제릉의 판위는 좌측에 자리 잡고 있다.

정자각의 모습.

의릉 전경. (사진자료: 궁능유적본부)

▶정자각

능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중심 건물이며,
위에서 보면 제수를 진설하는 'ㅡ'자 모양의 정청과 제향을 드리는 'ㅣ'자 모양의 배위청이 
합쳐진 모습이 '丁'(고무래 정) 자 모습이라 정자각이라고 한다.
의릉의 정자각은 양쪽에 익랑을 한 칸씩 더 두어 정전 5칸에 배위청 3칸이 덧붙은 8칸으로 되어 있다.

위에서부터 경종, 선의왕후, 정자각 순이다. (사진자료: 궁능유적본부)

정자각은 숭릉, 익릉, 휘릉, 의릉 정자각만이 정전 5칸에 배위청 3칸이 덧붙은 8칸 정자각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정전 3칸, 배위청 2칸으로 5칸의 정자각으로 되어있다. 

▶정자각 계단

정자각 계단은 정면에 두지 않고 측면에 만들었다.
이는 해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떠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섭리를 
건축물에 활용한 것이라고 한다.
왼쪽은 신이 오르는 신계와 오른쪽은 왕과 왕세자가 오르는 어계로 구분되어 있다.

정청 내부에는 제수를 진설하는 제상(祭床)과 향을 올리는 향상(香床),
축문을 올리는 축상(祝床) 등이 진열되어 있다. 

▶신로

제향을 받은 혼령은 신문을 나와 신로를 따라 능침으로 돌아간다.

신문에서 본 홍살문과 입구 전경.

▶산신석

장사 후 3년 동안 후토신(땅을 관장하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정자각 뒤 오른편에 있다.

▶기신제

전주이씨대동종약회에서는 매년 8월 25일에 의릉에서 제향을 드린다고 한다.

▶주근도배(柱根塗褙)

붉은 기둥의 아래에는 흰색과 위에는 푸른색으로 주근도배(柱根塗褙)를 칠하였다.
하얀색은 구름을 상징하고 파란 테두리는 하늘을 상징한다.
정자각을 멀리에서 보면 하늘(구름)에 떠있는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하여 
운상각(雲上閣)이라고도 한다.
이는 '구름 위는 신들이 노니는 공간으로 정자각이 
천국에 있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라고 한다.

▶비각

왕의 행적을 적은 신도비나 표석을 보호하는 건물.

▶표석

표석 전면에는 '조선국 경종 대왕 의릉 선의왕후 부'라고 적혀있다. 

▶서쪽 정자각 계단

제례를 마친 제관들이 계단을 내려와 북서쪽에서 제례를 끝낸다는 의미로 
지방을 불사르고 제물을 예감에 묻는다.

▶예감

제향에 사용된 축문을 태워서 묻는 돌구덩이. 
망료: 제사가 끝나고 축문이나 지방이 불에 다 탈 때까지 지켜보는 일.

서쪽에서 바라본 능 전경. 

정자각 추녀마루 위에 있는 용두와 잡상들이다.
대부분의 왕릉 정자각에는 용두 외 잡상이 3개가 올라가 있는데 이곳은 5개가 올라가 있다.
맨 뒤가 용두이고 앞에서부터 삼장법사 (대당사부), 손오공 (손행자), 
저팔계, 사화상 (사오정), 이귀박순이다.

▶잡상

잡상은 모든 기와지붕 위에 설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궁전건물과 궁궐과 관련이 있는 건물에 한정된다. 
또한 궁전건물 중에서도 양성으로 되어 있는 내림마루와 귀마루(추녀마루)에만 배치되고 
기와로 마감된 지붕마루에는 설치하지 아니하였다. 
잡상이 설치되어 있는 건물로는 궁궐의 정전, 왕의 침전, 궁궐의 정문, 
도성의 성문, 궁궐 안의 누정, 왕릉 왕비릉의 정자각, 종묘, 성균관, 동묘 등에 한정되며 
민가, 사원, 서원, 지방향교 등에는 잡상을 설치하지 안 했다고 한다.

위에 경종과 아래 선의왕후의 동원상하릉이다. (사진자료: 궁능유적본부)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동원상하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상하로 배치하고 석물들을 별도로 설치하는 
이봉이실(二封二室)의 동원상하봉(同原上下封)의 형식이다. 정자각(丁字閣)은 능침 아래에 둔다. 
이처럼 남북으로 길게 뻗은 능선의 여러 무덤을 쓸 때는 북상(北上) 개념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산의 흐름상 뒤쪽이 높고 앞쪽이 낮은 고상저하(高上低下), 
즉 상하를 구분하는 유교적 위계질서에 맞춰 왕은 상봉에, 왕비는 하봉에 둔 것이다. 
능침을 좌우가 아닌 상하로 조성한 이유는 첫째 봉분을 좌우로 조성하기에는 언덕이 좁거나 넓지 않고, 
둘째 풍수상으로 두 개의 봉분을 좌우로 앉힐 경우 생기(生氣)가 왕성한 정혈(正穴)을 비켜 가기 때문에 
왕릉 모두 정혈에 두고자 한 것이다.

경종의 가계도.

▶경종

경종은 숙종과 옥산부대빈(희빈) 장 씨의 아들로 1688년(숙종 14) 창경궁 취선당에서 태어났다. 
경종이 태어나고 원자로 정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 기사환국(己巳換局), 
서인에서 남인으로 정권이 교체된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690년(숙종 16)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701년(숙종 27)에 무고의 옥으로 
어머니 장 씨의 죽음을 목격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후 1717년(숙종 43) 숙종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았고(대리청정), 
1720년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경덕궁(현 경희궁) 숭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경종 재위기간에는 노론과 소론이 치열하게 대립하여 옥사가 일어나 이를 수습하였고, 
1723년(경종 3) 서양의 소화기를 참고하여 수총기(水銃器)가 만들어졌다. 
이후 1724년(경종 4) 창경궁 환취정에서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기사환국(己巳換局)

1689년(숙종 15년) 숙종의 계비 인현 왕후 민 씨가 여러 해가 되도록 후사가 없자 
숙종은 장희빈의 아들(후에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였다. 
이에 서인은 이를 반대하였고 남인은 찬성하였다. 
이를 반대하는 과정에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사약을 받았다. 
이로써 경신환국 이후 권력을 잃었던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장희빈은 왕비가 되고 인현 왕후는 폐비가 되었다.

경종은 짧은 재위기간과 소론과 노론 간 벌어진 당쟁 탓에 
병약했던 경종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고 즉위 4년이 되던 
1724년 급서 하여 큰 치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하지만, 경종은 서양의 수총기(소화기)를 모방해 제작했고, 
독도가 우리의 영토라는 내용을 담은 남구만의 '약천집'을 간행하였다.

▶선의왕후

선의왕후 어 씨(재세 : 1705년 음력 10월 29일 ~ 1730년 음력 6월 29일)는 
본관이 함종인 함원부원군 어유구와 완릉부부인 이 씨의 셋째 딸로 
1705년(숙종 31) 숭교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718년(숙종 44) 왕세자빈 심 씨(단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경종과의 사이에서 소생을 낳지 못하였으며, 
영조가 즉위하자 경순왕대비(敬純王大妃)가 되었다. 
이후 1730년(영조 6) 경덕궁(현 경희궁) 어조당에서 26세로 세상을 떠났다.

의릉 두 능의 봉분은 모두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렀고, 난간석에 십이지신을 문자로 새겼다. 
경종의 능침과 선의왕후 능침 석물은 각각 조성되었으나 곡장은 경종의 능침에만 둘렀다. 
의릉의 무석인은 갑옷 아래에 표범가죽을 두른 모습으로 조각된 것이 특징인데, 
특히 경종의 능침 무석인이 두른 표범가죽은 둥글게 말린 꼬리까지 표현되어 있다. 
또 선의왕후의 능침 석호는 다른 왕릉의 석호와 달리 꼬리가 등 위까지 올라가게 표현되었다.

동쪽에서 본 능의 모습.

의릉에는 수복방과 수라간, 재실은 소실되어 현제는 없는 상태다.

능을 뒤로하고 숲길로 떠나보자.

숲길 코스로 약 1시간 정도 소요된다.
겨울철 입산통제 기간 12월 1일 ~ 5월 15일까지만 빼고 이용할 수 있다.

가는 길에 이쁜 버섯이 살포시 얼굴을 내밀었다.

신록이 우거진 자연 속에서는 특별하게 활동을 하지 않아도 절로 힐링이 되는 느낌을 받는다.

▶의릉 향나무 (수령 160년) 

향나무는 불교와 많은 인연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예부터 향나무는 청정을 뜻한다고 하여 궁궐, 절, 무덤가에 흔히 심어졌고 
또한 불교에서는 모든 의식에 반드시 향불을 피워 부정을 제거하고 
정신을 맑게 함으로써 신명과 통한다 하여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모든 제사 의식에 맨 먼저 향불을 피웠는데, 
이것을 분향이라고 하며 지금도 행하고 있다.

▶중앙정보부 강당

이 강당은 1962년부터 1995년까지 옛 중앙정보부에서 사용했던 강당으로 
1962년에 건축가 나상진의 설계로 지어진 건물이다. 
이후 10년 뒤 강당 옆에 회의실을 지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이곳에서 1972년 분단 이후 최초로 남한과 북한이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한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역사적인 장소성을 인정받아
 2004년 등록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었다.

▶7·4남북공동성명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남북 간 정치적 대화통로와 한반도 평화정착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발표한 남북한 당사자 간의 최초의 합의 문서이다.

중앙정보부가 사용하던 옛 강당(좌측, 1962년 건축)과 
회의실(우측, 1972년 건축)은 아직 남아있다.

중앙정보부 강당을 지나 숲길은 이어진다.

등이 구부러진 소나무는 제 살길을 찾으려고 사력을 다해 헤쳐 나간다.
어찌 보면 우리의 인생도 고난의 삶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매일매일
발버둥 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소나무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가던 길 가라고 한다.

생명을 다한 색 바랜 나뭇잎은 살포시 내려와 어미나무의 밑거름이 되어준다.  

철문을 열고 능을 벗어나 숲길을 따라 천장산으로 올라간다.

초입 계단을 따라 오르막이 시작된다.

삼거리를 지나 오르막은 계속된다.

이정표는 없어도 콘크리트 길이 정상까지 안내한다.

가는 길에 숲사이로 월계동 방향이 시야에 들어온다.

며느리밥풀 꽃.

자연이 선물하는 쾌적한 숲길은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며 건강은 보너스로 얻어간다.

평일 아무도 없는 숲길은 고즈넉함을 넘어 음산한 느낌마저 든다.

콘크리트 길을 올라오면 의자가 있는 쉼터공간이 주어진다.

잠시의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이어간다.

우측 철망 옆으로는 천장산 하늘길이 같이 발을 맞추고 있다.

계단을 오르면 천장산 정상이다.

천장산은 140m로, 천장산 정상은 아무것도 없다.
벤치 2개만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다.
벤치가 외로워 보여 잠시 안 잤다가 내려간다.
하지만 철망너머로 천장산 정상부는 여기와 사뭇 다르다.

 

▶천장산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 청량리동 · 석관동에 걸쳐 있는 해발 140m의 산으로 
풍수지리상 명당터로 손꼽히는 곳이다. 
조선시대에 이곳을 두고 '하늘이 숨겨둔 곳'이라 하여 천장산이라고 하였다. 

내려오는 길에 북한산이 시원스레 조망된다.

좌측 철망 넘어 천장산 하늘길은 2020년 1월에 국립산림과학원(홍릉숲)에서
이문어린이도서관으로 이어지는 총 1.76㎞ 코스로 조성되었다.
기존 임도와 숲길을 최대한 활용해 자연을 보전하며 정비돼 
어느 산책로보다도 자연 친화적이다. 
또한 방문객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산책할 수 있도록 지형에 맞춰 목재 데크와 계단, 
야자 매트 등이 설치됐고 야간조명과 무인 감시카메라도 갖췄져 있다.

돌아서 다시 삼거리로 내려왔다.

역사경관림 복원지역으로 내려간다.

내려오면서 정자각을 한번 더 바라본다.

▶의릉 해설안내

매주 토요일 10:00, 14:00와 일요일 14:00에는 왕릉해설사의 안내로 
능역을 탐방할 수 있으며 보다 자세한 내용을 담아 갈 수 있다.

 

 

이로써 의릉 숲길을 한 바퀴 돌고 의릉 문을 나선다.
잠시나마 도시의 복잡함을 비우고 자연의 소박함을 채우는 
온전한 휴식 같은 나의 시간이 된 것 같아 정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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