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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홍유릉(고종과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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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릉, 홍릉과 유릉]

홍릉에는 조선의 제26대 고종과 명성황후가 그리고 제27대 순종과 순명효 황후, 
계비 순정효황후의 유릉이 나란히 있다.
두 능을 합쳐서 ‘홍유릉’이라고 부르며, 때론 '금곡릉'이라 불러기도 한다.
명성황후는 원래 1897년 청량리 홍릉에 묻혔다가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뜨자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홍릉과 유릉은 기존의 조선왕릉 형식이 아닌 대한제국 황제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역사상 마지막 왕릉이자 최초의 ‘황릉’이라고 한다.

 

[홍유릉 역사]

1897년(광무 1) : 고종 황후 명성황후의 홍릉 조성.(현 서울 청량리 홍릉수목원 경내)
1900년(광무 4) : 황제릉의 형식으로 현재의 자리에 홍릉 공사.
1905년(광무 9) : 순종 첫 번째 황태자비 순명비의 유강원 조성.(현 서울 어린이대공원 근처)
1907년(융희 1) : 유강원을 유릉으로 높임.
1919년 :  홍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긴 후 고종과 합장함.
1926년 :  유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긴 후 순종과 합장함.
1964년 :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부인 의친왕비묘 조성.
1966년 :  순종 두 번째 황후 순정황후를 유릉에 합장함.
1967년 :  고종 후궁 광화당 귀인 이 씨의 묘 조성.
1970년 :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영원 조성, 고종 후궁 삼축당 김 씨의 묘 조성.
1971년 :  영원을 현재의 자리로 옮김.
1989년 : 고종 딸 덕혜옹주의 묘 조성, 의민황태자비 이 씨를 영원에 합장함.
1996년 : 의친왕묘를 현 서삼릉 경내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긴 후 의친왕비와 합장함.
2005년 : 황세손 이구의 회인원 조성.
2009년 : 귀인 장씨묘와 수관당 정 씨 묘를 현 서삼릉 경내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김.

 

[홍유릉 가는 길]

경춘선 금곡역 1번 출구에서 도보.
경춘선 금곡역 1번 출구에서 55번 이용 홍유릉 후문 하차.
중앙선 도농역 2번 출구에서 1-4, 23, 30, 93번 이용 이석영광장, 홍유릉에서 하차.

 

[홍유릉 입장료]

입장료: 1, 000원.
지역구민 50% 할인.
문화가 있는 날 무료.
만 24세 이하 및 만 65세 이상 무료. 
장애인, 유공자 무료.
매주 월요일 휴무. (휴무일이 공휴일과 겹칠 경우 다음날 휴무) 

 

[홍유릉 개방시간]

5월: 09시 ~ 17시까지, 6월: 09시 ~ 17시 30분까지.
10월: 09시 ~ 17시까지, 11월: 09시 ~ 16시 30분까지.

 

[홍유릉 주차요금]

관람객 무료.

 

홍유릉 안내도.

황실 가계도.

▶삼문.

삼문은 사당이나 제실에 쓰는 문의 형식이며,
세 칸 중 어칸(가운데 칸)은 혼이 다니는 문이라 하여 사람이 쓰지 않는다고 한다.

▶세계유산 비.

조선시대의 27대 왕과 왕비 그리고 사후에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44기 중 40기가 2009년 6월 30일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홍릉, 유릉 사적 제207호.

입구 매표소.

▶홍유릉 역사 문화관.

이곳은 홍유릉에 관한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유릉 재실.

재실 입구.

▶재실.

재실: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
안향청: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곳.
제기고: 제기를 보관하는 곳.
전사청 : 재물을 준비하는 공간.
행랑청(행랑채): 하인방, 마구간, 창고, 집사방등으로 구성.

 

 

 

▶홍살문.

홍살문은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 지붕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운 형태로, 
중앙에는 삼 태극무늬가 있다.

[유릉]

대한제국 2대 순종황제와 첫 번째 황우 순명효황후 민 씨와 
두 반째 황후 순정효황후 윤 씨의 능으로 묘좌유향한 동봉이강릉이다. 
1904년 9월에 순명황후 민 씨가 사망하자 11월에 용마산(현 서울어린이대공원)에 
안장해 유강원이라 했으나 순종이 즉위하면서 황태자비였던 민 씨를 황후로 추존해 
유릉으로 높여졌다고 한다. 
순종은 1926년 4월에 사망하여 6월에 남양주시 금곡동 유릉 이전하여 함께 안장했으며, 
순정황후 윤 씨가 1966년 1월에 사망하자 세 분의 부부가 이곳 유릉에 함께 안장되었다.
유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세 분이 합장된 능이라고 한다.

▶판위.

제사 때 제관과 초헌관이 서있는 자리.
조선왕릉은 우측에 있으나 황제릉의 판위는 좌측에 자리 잡고 있다.

▶향로와 어로.

향로(향과 축문)와 참배자(왕 또는 제관)가 이용하는 어로로 구분된다. 
조선왕릉과 달리 향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어로가 설치되어 있어 
조선왕릉의 2단으로 되어 있는 것과 구분이 된다.

▶참도.

홍살문 앞에서 정면의 침전까지 얇은 돌을 깔아 만든 긴 돌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참도라고 한다.

 

조선 왕릉의 정자각에서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정자각의 좌우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 달리 
황제릉은 정자각 대신 침전으로 바뀌었으며 정면에도 3개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침전.

기존 조선왕릉과 달라진 점이 제향을 지내는 건물인 정자각을 대신해  
일자형 침전으로 바꾸었고 침전 안에는 어탑과 당가를 배치하였다. 

침전 내부.

▶순종  

순종은 대한제국 1대 황제 고종과 명성황후의 아들로 1907년 고종의 뒤를 이어
2대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면서 신분이 왕족으로 낮아져 
조선국 이왕이라 불렀다.
1926년 4월 25일 대조전에서 53세로 세상을 떠나 같은 해 6월 11일 
고종의 홍릉 곁에 유릉을 만들었는데, 이때 먼저 세상을 떠난 순종의 첫 번째 황후 
순명황후를 옮겨와 함께 모셨다 한다. (사진자료: 궁능유적본부)

[순명황후]

1872년 양덕방 계동에서 태어나, 1882년에 11살의 나이로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897년에는 황태자비로 책봉되었으나, 남편인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인 
1904년 11월 5일(음력 9월 28일)에 경운궁의 강태실에서 33살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 용마산 내동(현재 어린이대공원 경내)에 유강원에 안장했다. 
시호는 처음엔 순열비라 했다가 나중에 순명비로 고쳤고, 1907년 순종의 즉위에 따라 
황후로 추봉되어 순명황후로 올려졌고, 능호도 유릉으로 바꾸었다. 
이후 순종이 있는 유릉으로 1926년 6월 25일에 이장되어 합장으로 모셔졌다.
(사진자료: 궁능유적본부)

[순정왕후]

황태자비 민 씨가 1904년에 사망하자, 1906년 12월 13세에 황태자비로 책봉 되었고, 
이듬해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되면서 그 지위도 왕후로 격하되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온화한 성정과 기품을 잃지 않았던 순정효황후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로서, 당당함과 냉철함으로 황실을 이끌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만년에 고독과 비운을 달래기 위하여 불교에 귀의, 대지월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1966년 2월 3일, 창덕궁의 낙선재에서 향년 73세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그해 2월 13일,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유릉에 순종과 합장하게 되었다.
(사진자료: 궁능유적본부)

▶산신석

장사 후 3년 동안 후토신(땅을 관장하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정자각 뒤 오른편에 있다.

예감

제향에 사용된 축문을 태워서 묻는 돌구덩이. 

망료: 제사가 끝나고 축문이나 지방이 불에 다 탈 때까지 지켜보는 일.

동쪽계단.

서쪽게단.

▶비각.

왕의 행적을 적은 신도비나 표석을 보호하는 건물.

▶표석.

'대한 순종효황제유릉', '순명효황후부좌', '순정효황후부우'

수복방.

▶어정.

왕을 위한 우물.

 

 

 

 

 

▶홍릉 연지.

고종황제가 홍릉을 새로 조성할 때 작은 연못을 연지로 크게 확장하여 공사한 것으로,
일반적인 조선왕릉의 방형 연지가 아닌 원형 연지로 조성한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홍릉으로 가는 길.

홍릉 재실.

재실입구.

▶홍릉 재실.

재실: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
안향청: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곳.
제기고: 제기를 보관하는 곳.
전사청 : 재물을 준비하는 공간.
행랑청(행랑채): 하인방, 마구간, 창고, 집사방등으로 구성.

수복방.

수라간.

▶홍살문.

앞에  있는 네모난 돌은 예전에 홍살문이 있던 자리의 받침대라고 한다.

[홍릉]

사적 제207호 홍릉은 조선 제26대 고종과 비인 명성황후 민 씨의 능이다. 
명성황후는 1895년 8월 학살당하여 같은 해 10월 청량리 홍릉에 장사했다가 
1919년 1월 홍릉으로 이전하여 같이 안장했다. 
유릉과 더불어 석물과 침전 등을 황제릉의 형식으로 구성했는데, 
그렇다고 중국 황제릉 형태를 모방한 것은 아니고 기존 한국 왕릉 특유의 양식을 
기본으로 하되 명나라 홍무제가 안장된 효릉의 묘제를 참고하였다 한다.

홍살문 받침대와 판위.

지당.

조선왕릉의 능침공간에 있던 문석인, 무석인, 석마, 석양, 석호 등을 
황제릉에서는 침전 앞으로 배치하였고, 석양과 석호를 없애고 기린석, 코끼리석, 사자석, 
해치(해태) 석, 낙타석, 석마 순서로 바꾸었다.

조선왕릉에는 없는 정면에 3개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침전 앞에서 본 전경.

앞에서부터 문석인, 무석인, 기린석, 코끼리석, 해태석, 사자석, 낙타석, 
말석의 순으로 석수가 양옆으로 세웠져 있다. 

▶침전.

임금의 침방이 있는 집을 말함.

▶고종 

고종은 1863년 조선 25대 왕 철종이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당시 대왕대비였던
신정황후의 양자가 되어 12세 때 왕의 자리에 올랐다.
재위 시절 서양 국가와 적극적으로 교류했으며, 1897년에는 세계열강과 동등한 국격을
갖추기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1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1907년 황제의 자리를 아들 순종에게 물려주었으나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주권을 빼 아끼면서 조선국 이태왕이라 불리게 되었다.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홍릉에 고종과 명성황후를 함께 모셨다.
(사진자료: 궁능유적본부)

[명성왕후]

명성황후는 1851년 9월 25일 경기도 여주 근동면 섬락리에서 민치록과 한산 이 씨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뉜다.
개화의 선각자이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정치가이자 일제의 국권 침탈에 저항한 
국모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추악한 권력 투쟁을 벌인 
부덕한 며느리이자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든 권력욕의 화신이라는 평가도 있다고 한다.
명성왕후는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일본 자객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낭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명성황후는 시해된 후 폐서인이 되었지만 같은 해 다시 복위되었고, 
2년 뒤인 1897년 10월 대한제국 수립과 더불어 명성황후로 추존되었다.
1897년(광무 1) 11월 22일 청량리(현 숭인원)에 처음 장사 지냈으며, 
1919년 1월 16일 현재 위치로 능을 옮겼다.
(사진자료: 궁능유적본부)

▶예감.

제향에 사용된 축문을 태워서 묻는 돌구덩이. 

망료: 제사가 끝나고 축문이나 지방이 불에 다 탈 때까지 지켜보는 일.

어정.

비각.

▶표석.

대한 고종태황제홍릉, 명성태황후부좌.

 

 

영원과 회인원 그리고 덕혜옹주와 의친왕 묘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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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과 회인원 안내도.

영원과 회인원 입구.

영원과 회인원 재실.

 

▶영원.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와 그의 부인 의민황태자비(이방자)가 안장된 원이다. 
이곳은 영친왕이 생전에 황제에 오른 적이 없다는 점을 감안해서, 
고종 이전 다른 역대 조선 왕릉들처럼 제후국의 왕릉 양식으로 능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황제릉은 좌우에 어로가 설치되어 있지만, 조선왕릉은 한쪽만 어로가 설치되어 있다. 

황제릉의 침전을 대신해 조선왕릉은 정자각이 세워져 있다.

▶왕실 무덤 분류.

능: 왕과 왕후, 황제와 황후의 무덤.
원: 왕의 사친(왕의 후궁이나 종친)과 왕세자, 왕세자빈, 황태자, 황태자비의 무덤.
묘: 폐위된 왕이나 일반 무덤.

동쪽계단.

서쪽계단.

정자각에서 본 홍살문.

비각.

▶표석.

대한 의민황태자영원, 의민황태자비부좌.

영원과 회인원으로 오르는 길.

 

좌측 영원으로 가는 길.

남양주 영원의 원소는 곡장을 두르고 그 안에 봉분과 석물을 조성하였다. 
봉분은 호석을 생략하고 주위에 난간석을 두른 형태로, 난간석의 중간 받침대는 연화문을 조각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재실, 홍살문, 판위, 정자각, 비각 등이 배치되어 있고, 
수복방과 수라간은 설치하지 않았다. 
봉분에는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는 
조선왕릉의 형식과 같은 개수로 배치하였다. 
석물들의 조각은 남양주 홍릉과 유릉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형식을 띠고 있다.

[의민황태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이자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다. 
1900년 영친왕에게 봉해졌고, 1907년 순종 황제 때 황태자가 되었으나, 
국권을 빼앗긴 후에는 왕세자로 불리다가 순종이 죽은 후, 
왕이 되었으나 역사적으로는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1920년 일본의 왕족 마사코(方子)와 강제로 결혼하고 일본에 거주하다가 
해방 이후 1963년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당시 이미 건강이 악화되어 별다른 활동 없이 1970년에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의민황태자비]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로 일컬어지는 이방자는 1901년 11월 4일 도쿄에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인데 영친왕 이은과 결혼한 뒤 남편의 성씨를 물려받았다. 
일본 왕족 모리마사 친왕의 딸로 의민황태자와 결혼하여 진(晉) 과 구(玖) 두 아들을 낳았다.
1963년 의민황태자와 함께 귀국하여 여생을 사회복지사업에 헌신하였으며,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국적을 묻는 질문에는 단호하게 "이제는 한국인입니다"라고 말할 만큼 
한국인으로서 살려는 의지를 보였고, 호칭 또한 "그냥 편한 대로 '여사'라는 호칭을 써 주세요."라고 
직접 대답한 적이 있다.
1989년 4월 30일 향년 87세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나자, 영원에 합장되었다.

좌측 영원, 우측 회인원. (사잔자료: 국가유산청)

회인원 곡창.

▶회인원.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의 차남이자, 마지막 황세손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회은황세손 이구(1931~2005)가 안장된 무덤. 

한동안 봉분만 남아 있었으나, 2021년 문화재청의 심의를 거쳐 
지금은 원의 격에 맞게 주변에 석물이 설치되었다 한다.

홍유릉 숲길을 따라 덕혜옹주와 의친왕 묘로 가는 길.

 

덕혜옹주와 의친왕 묘 입구.

덕혜옹주와 의친왕 묘 안내도.

▶덕혜옹주 묘.

조선왕조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막내(고명) 딸인 덕혜옹주의 묘이다.
덕혜옹주는 9세가 될 때까지 복녕당 아가씨로 불리다가 1921년에 덕혜옥주에 봉해졌고,
1925년에 일제가 유학이라는 명분을 세워 일본으로 데려갔다.
19세에 소 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하여 딸 하나를 나았다.
1962년에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에서 기거하다가
1989년 덕혜옹주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덕혜옹주묘에는 장명등, 망주석, 상석, 표석을 배치하였다.

▶의친왕묘.

조선왕조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 이강과 
그의 부인 의친왕비 김 씨(김수덕)가 합장된 묘이다.
1955년 의친왕이 세상을 떠나자 처음에는 서울 화양리에 묘를 조성하였다가 
1965년에 고양 서삼릉으로 옮긴 후, 1995년에 다시 현재의 자리로 묘를 옮겼다.
묘를 옮기면서 1964년에 세상을 떠나 홍유릉 경내에 조성한 의친왕비의 묘소도 함께 
옮긴 후 합장하였다 한다.

▶의친왕비.

1880년 아버지 김사준과 어머니 황긍연의 딸 사이의 5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1893년 12월 6일에 의친왕과 혼인하여 1907년에 의친왕비에 책봉되었다.
1955년 8월 9일에 남편 의친왕이 죽기 직전에 천주교에 귀의해 세례성사를 받았고, 
같은 달 14일에 의친왕비도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슬하에 자식이 없이 1964년 1월 14일에 칠궁에서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홍유릉 경내에 모셨다가 1995년에 의친왕묘를 천장 할 때 의친왕과 합장하였다 한다.

 

연지.

 

수련.

후궁 묘역 안내도.

▶수인당 김 씨 묘. (의친왕의 후실)

의친왕의 측실이자 이우, 이주, 이곤의 생모인 수인당 김 씨의 묘.

▶수관당 정 씨 묘. (의친왕의 후실)

의친왕의 측실이자 이건의 생모인 수관당 정 씨의 묘. 

▶귀인 장 씨 묘. (고종의 후궁)

조선왕조 제 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후궁이자 의친왕 이강의 생모인 귀인 장 씨의 묘. 
초장지는 알 수 없으나 1911년 고양군 둑도면 모진 2리로 이장하였고, 
1965년에 서삼릉 능역 내로 이장하였으며, 다시 2009년 6월에 홍유릉능역 내 후궁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광화당 이 씨 묘. (고종의 후궁)

조선왕조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후궁이자 이육의 생모인 광화당 이 씨의 묘이다. 

▶삼축당 김 씨 묘. (고종의 후궁)

조선왕조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후궁인 삼축당 김 씨의 묘이다. 
법도를 깨고 아이를 낳은 후궁에게만 내리는 당호와 금반지를 내려 삼축당이라 부르게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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