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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연산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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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연산군과 거창군부인의 묘를 비롯하여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 씨의 묘, 
연산군의 딸(휘순공주)과 사위(능양위 구문경)의 묘가 같이 있다. 
이 묘역은 원래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땅이었는데, 임영대군은 세종의 명으로 
자식이 없던 태조의 후궁 성비 원 씨와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를 모셨다. 
1454년(단종 2) 의정궁주가 세상을 떠나자 자신의 땅인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고 제사를 맡았다. 
이후 임영대군의 첫째 아들 오산군이 맡았고, 
오산군의 묘 역시 이 근처에 조성되어 오산군 파에서 묘를 관리하였다.
그러다가 1512년(중종 7) 임영대군의 외손녀인 거창군부인이 강화 교동에 있던 
연산군묘를 자신의 외할아버지 땅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달라고 중종에게 요청하였다. 
이로 인해 원래 있던 의정궁주묘 위에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묘가 조성되었고, 
의정궁주묘 아래에 연산군의 딸과 사위의 묘가 조성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관람안내]
2~5월, 9~10월    09:00~18:00
6월~8월  :  09:00~18:30
11월~1월  :  09:00~17:30
매주 월요일 휴무 (월요일이 공휴일일 경우 다음 날)

 

[대중교통]
주소:서울 도봉구 방학로 17길 46호
쌍문역 2번 출구 중앙버스정류장 130번 버스 이용.
연산군, 정의공주묘 하차, 도보 3분.
창동역 1번 출구에서 15번 마을버스 이용 정의공주묘 하차.

 

종합안내도.

연산군 묘 입구.

연산군 묘는 사적 제 362호로 지정되었다.

묘역 해설도.

연산군 계보.

입구에서 짧은 계단을 오르면 
이렇게 일직선상에 놓인 묘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묘역에는 총 5기의 묘가 있는데, 
최상단에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 씨의 묘가 쌍분 형태로 조성되어 있고, 
최하단에는 연산군의 사위 능양위 구문경과 휘순 공주의 묘가 있으며
그 사이에 단독으로 조성된 의정궁주 조 씨의 묘가 있다. (사진자료: 궁능유적본부)

▶연산군

조선의 제10대 왕인 연산군은 성종의 맏아들 이융이다.
물 깊고 넓을 '융'인데 이름과는 먼 생을 살았던 것 같다.
어머니는 관봉상시사 윤기견의 딸인 폐비 윤 씨이다.
폭군의 대명사인 연산군. 그는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 두 차례의 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비롯한 문신들을 대거 처형하고 언론 활동을 억압했으며, 
당시 사대부들의 윤리관에 어긋나는 행동을 거듭하다가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인물이다.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 교동에서 그해 11월 병사했다. 
1512년에 부인 신 씨가 묘를 강화도에서 이곳으로 옮겨줄 것을 요청하여
중종은 1513년에 양주군 해등촌(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으로 이전해 
제사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곳에는 ‘연산군지묘’라고 적힌 석물 외에 아무런 장식이 없다. 
연산군은 15대 광해군과 함께 조선 시대 폐주 가운데 한 사람이며, 
《선원계보(璿源系譜)》에도 묘호와 능호 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o 무오사화 - 보통 훈구파 이극돈과 유자광이 손잡고 청렴결백한 사림파를 제거한 사건.
o 갑자사화 - 연산군의 친어머니 폐비 윤씨와 관련되어 많은 선비가 숙청된 사건.

▶거창군부인 신씨

거창군부인 신 씨(재세 : 1476년 음력 11월 29일 ~ 1537년 음력 4월 8일)는 
본관이 거창인 거창부원군 신승선과 중모현주 이 씨(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딸)의 딸로 
1476년(성종 7)에 태어났다. 
1488년(성종 19) 왕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494년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거창군부인으로 신분이 낮아져 
궁 밖 정청궁에서 생활하였다. 
1537년(중종 32)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역은 대군의 예우로 장례하여 묘 뒤에 둘러싼 작은 담 곡장, 묘비 1쌍, 
상석 1상, 봉분 좌, 우측에 세우는 망주석, 어두운 사후 세계를 밝힌다는 장명등 1쌍, 
문석인 2쌍, 향로석, 재실을 갖추고 있다. 

비록 폐주이지만 대군의 예로 묘를 조성했으며 병풍석, 석마, 사초지 등은 세우지 않았다.

연산군 묘 앞 묘비와 상석, 밑으로 장명등이 보인다. (사진자료: 궁능유적본부)

연산군 묘비

연산군묘비 전면에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 후면에 ‘정덕 8년 2월 20일 장(正德八年二月二十日葬)’, 
부인 신 씨의 묘비는 전면에 ‘거창신씨지묘(居昌愼氏之墓)’, 후면의 경우 앞구절은 파손되었고 
뒷구절에 ‘6월 26일 장(六月二十六日葬)’이라 새겨져 있다.

▶의정궁주 조 

1422년 변계량의 건의로 태상왕 태종의 빈을 뽑기로 하여, 
2월 28일 의정궁주 조 씨가 간택되었으나 태종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 해 5월 10일 태종이 죽자, 조 씨는 입궁하여 9월 25일 의정궁주가 되었다.
1453년 큰오빠 조순생이 계유정난 당시 안평 대군의 일파로 몰려 이듬해 죽임을 당하였다. 
궁주 조 씨 또한 1454년 세상을 떠났다.
묘역이 위치한 땅은 본래 세종의 아들 임영 대군의 땅이었는데, 
의정궁주의 제사를 임영 대군이 맡도록 하여 이곳에 궁주를 안장하였다고 한다. 
(사진자료: 궁능유적본부)

묘역은 묘비와 혼유석, 문석인이 배치되어 있으며
유일하게 병풍석이 마련되어있다.

▶연산군의 딸(휘순공주)과 사위(능양위 구문경)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는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 씨의 장녀로 태어나 휘순공주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구문경과 혼인하였으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공주의 칭호를 없앴다. 
연산군의 사위 구문경은 본관이 능성인 구수영과 길안현주 이 씨(세종의 아들 영응대군 딸)의 
아들로 태어나, 1501년(연산군 7) 휘순공주와 혼인하여 능양위가 되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관직이 취소되었다. 
반정 이후 아버지 구수영이 중종에게 휘순공주와의 이혼을 요청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묘역은 묘비가 각각 있고, 상석, 향로석, 문인석 등의 석물과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망주석과 장명등 등이 갖추어져 있다.

재실로 이어지는 길이다.

재실 앞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

묘지를 지나 재실로 내려서게 만들어져 있다.

▶재실

재실 구성은 묘 관리인 참봉 집무실인 재실,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행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재실에서 발견된 치제 현판에는 영조 때 연산군 외손에게 연산군의 제사를 지내게 하고, 
관청에서 제수를 주고 군사를 배치하여 묘를 지키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연산군 치제 현판

연산군의 묘소를 외손으로 하여금 설, 단오, 추석 동지와 기일에 제사를 받들게 하며 
관에서 제수를 공급하고 묘를 지키는 군사 10명을 배치하였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연산군 묘각 중건기 현판

1903년(고종 40) 당시 양주 군수였던 홍태윤이 지나다가 연산군 묘가 허물어진 것을 보고 
고종에게 건의하여 황제의 칙명으로 묘역을 정비하고 묘사를 건립한 
홍태윤의 공을 치하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한다. 
복제품으로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조선왕실

왕의 아들 중에서 다음 대의 왕위에 오를 아들을 왕세자라 하였고 
그의 부인을 왕세자빈이라 하였다. 
왕세자를 제외한 나머지 왕의 아들 중에서 왕비의 소생일 경우에는 대군, 
후궁의 소생일 경우에는 군이라 하였다.
왕의 딸인 왕녀는 왕비의 소생일 경우에는 공주, 후궁의 소생을 경우에는 옹주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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