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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사적,기념관

독립공원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오늘은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아픈 역사가 간직된 
독립공원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녀왔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로 나와
좌측 독립공원을 먼저 둘러보고 역사관으로 들어간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가는 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
1호선: 종로3가역 환승 → 독립문역 5번 출구
2호선: 을지로 3가 역 환승 → 독립문역 5번 출구
4호선: 충무로역 환승 → 독립문역 5번 출구
5호선: 종로3가역 환승 → 독립문역 5번 출구

[입장료]
일반 : 3,000원
청소년, 군인 : 1,500원
어린이 : 1,000원
65세 이상, 6세 이하, 장애인, 국가유공자 : 무료

[주차요금]
승용차 : 10분당 300원
버스, 대형차 (15인승 이상) : 10분당 900원
장애인, 국가유공자 : 80% 할인

경차, 저공해, 다둥이 : 50% 할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연혁]

1908년 10월 21일 경성감옥으로 신축
1912년 9월 3일 서대문감옥으로 명칭변경
1923년 5월 5일 서대문형무소로 명칭변경
1945년 11월 21일 서울형무소로 명칭변경
1961년 12월 23일 서울교도소로 명칭변경
1967년 7월 7일 서울구치소로 명칭변경
1987년 11월 15일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
1988년 2월 27일 국가사적 지정(제324호)
1998년 11월 5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개관
2007년 3월 6일 제1종 전문박물관 등록(제37호)
2007년 10월 18일 국가현충시설 지정(제 10-1-23호)
2010년 11월 5일 전시물 교체 정비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로 나온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담장을 끼고 내려선다.

▶서대문 독립공원

1896년 독립협회가 서울의 독립문 일대에 조성한 공원으로
독립공원 내 위치한 독립문은 1896년 독립 협회가 자주독립운동의 상징물로써 
전 국민의 모금으로 세워진 석조건물로 독립관과 독립신문을 든 서재필 동상,
유관순 열사 동상, 3.1 독립선언기념탑 등 대한제국시기 자주독립운동의 
상징적 기념물들이 있다.

▶애국열사 유관순 동상

'유관순 열사'는 1902, 12, 16일 충남 목천군 이동면(현 천안시 병천면)에서 태어났다. 
1919년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이던 당시 3월 1일 탑골공원 만세운동과 3월 5일 대한문 앞에서 
망곡(望哭)을 한 뒤 남대문역(현 서울역) 시위에 참여하였다. 
3월 10일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으로 내려가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시위를 평화적으로 이끌었다. 
이날 시위로 일본 헌병대에 의해 부모님을 비롯하여 19명이 피살· 30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열사는 시위주동자로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체포 당시 당한 부상과 계속되는 고문으로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20, 9, 28 오전 8시 20분 
서대문형무소의 어두운 감방에서 순국하였다.

 

▶의사, 열사, 지사의 차이점
이 세 단어는 모두 사람의 마음이나 행동을 나타내지만, 그 의미와 맥락은 다르다.

1, "의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항거하다가 의롭게 죽은 사람.
      성패에 관계없이 무력으로써 적에 대한 거사를 결행하신 분으로 군인은 제외.
      예)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등

2, "열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저항하다가 의롭게 죽은 사람.
      주로 맨몸으로 싸우다 죽은 분을 가리킬 때 쓴다.
      혹은 직접적인 행동 대신 강력한 항의의 뜻을 자결로서 굳은 의지를 드러낸 분.
      예) 이준 열사, 유관순 열사, 이한열 열사, 박종철 열사 등

3, "지사"는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 건국포장 또는 대통령 표창을 받은 자를 지칭한다. 
      예) 애국지사 (이미 세상을 떠난 애국지사는 순국선열이라고 칭한다)

▶3.1 독립선언기념탑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서울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만세를 삼창 하며 거족적인 3.1 독립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3.1 독립선언기념탑은 3.1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해 재건국민운동본부에서 주관해 
모든 국민의 성금으로 1963년 8월 15일에 탑골공원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1979년 탑골공원 정비사업으로 철거되었다가 각계에서 복원을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서울특별시가 1992년에 항일독립운동의 터전인 이곳 서대문독립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탑 뒤에는 3.1 독립선언문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홍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독립문

1896년 9월 6일 국왕의 동의 하에 프랑스의 에투알개선문을 본떠서 서재필이 스케치한 것을 
근거로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하여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되었다.
구조는 중앙에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서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문 앞에는 구(舊) 영은문의 주초(柱礎)였던 두 돌기둥이 있다. 
1979년 성산대로를 개설하면서 원래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서 북서쪽으로 70m 떨어진 곳에
1980년 1월에 이전하여 복원하고 예전자리에는 독립문지라는 표지판을 묻어놓았다.

▶송재 서재필선생 동상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서재필'(1864~1951) 선생은 개화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선생은 1896.4.7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고, 
윤치호, 이상재 등의 협력을 얻어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종래 중국 사대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국민의 성금을 모아 한국독립의 상징으로 '독립문'을 세웠으며, 
1919년 3.1 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워싱턴에 구미위원회를 설치하자 
그 위원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고 
전 재산을 독립운동의 경비에 바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하셨으나 
1951년 1월 5일 미국에서 87세의 생을 마감하였다.

▶독립관

독립관은 원래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1407년(태종 7)에 건립하여 
모화관(慕華館)이라고 불렀던 건물이다. 
1897년 5월에 독립협회에서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축한 것이다. 
독립협회의 서재필, 윤치호 등은 사대주의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모화관의 명칭을 고쳐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독립관으로 명명하고, 그 건물을 독립협회 회관으로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 순국선열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곳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화환도 놓여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안내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입구.

1930년도의 서대문형무소의 모습.

매표를 한 후 안으로 들어선다.

서대문형무소 역사전시관.

서대문 안산 정상부가 가깝게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은 1908년 지어져 1987년 감옥 기능을 마감하기까지
지난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곳이다.

서대문형무소 역사전시관은 안내 동선을 따라 관람하면 된다.

▶민족저항실 1

대한제국의 말기 의병부터 1919년 3.1 운동까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항일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요 : 무게 5kg, 길이 3m로 수감자 노역 시 탈주를 방지하기 위해 허리에 채워던 형구.

용수 : 수감자 이송 시 일반인에게 독립운동가의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얼굴에 씌웠던 도구. 

족쇄 : 수감자 이동이나 노역 시 탈주를 방지하기 위해 양쪽 발목에 채웠던 형구.

수갑 : 수감자 이송 시 탈주를 방지하기 위해 손목에 채웠던 철제 수갑.

태극기 목각판 : 3.1 독립만세운동 당시 태극기를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 사용하였던 태극기 목각판.

유관순 열사 초상화.

▶민족저항실 2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상범’의 수형기록카드 약 4,800여 장을 전시하여 
그들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곳은 서대문형무소의 사형장 지하 시신수습실을 그대로 재현한 곳이다.

 

▶왈우 강우규 열사[ 曰愚 姜宇奎 義士 ]

1855년 7월 14일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태어났다. 
30세 때 함경남도 홍원으로 이사하여, 한의술로 환자를 치료하면서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여 장로가 되었고, 학교를 설립하여 청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1910년 국권피탈 후 만주로 건너가 지린성 라오허현에 정착하여 신흥촌을 건설하고 
광동중학을 세워 교육사업에 진력하였다. 
조국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박은식, 김치보 등과 상의하여 조국에 돌아가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를 폭살하기로 결심하고,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에서 사이토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다.

 

-1920년 11월 선생이 죽음을 앞두고 아들에게 남긴 유언-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던 날 
선생은 감상이 어떠냐는 일제 검사의 물음에 짤막한 시를 남기고 의연히 순국하였다 한다.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

▶민족저항실 3

1920년대부터 1945년 해방까지 서대문형무소와 관련된 항일 독립운동과 
사형장 지하 시신 수습실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지하 조사실

서대문형무소에 입감 되어 신체를 조사받고 대기했던 곳이며, 
일제 검찰이 수감자들을 취조했던 공간으로 취조 과정에서 
자행된 고문과 생존 애국지사의 육성 증언을 전시하고 있다.

 

▶물 고문

강제로 수조에 머리를 집어넣거나, 코나 입에 물을 마구 들어부어 
호흡을 곤란하게 하여 고통을 주는 방법.

▶임시구금실

취조 전 수감자를 임시로 잠시 구금하였던 곳으로
취조 과정에서 고문으로 인한 동지들의 고통소리와
비명소리를 듣게 하여 심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곳이다. 

▶취조실

고등계 형사가  집적 서대문형무소에 파견하여 취조하는 곳이다.

▶손톱찌르기 고문

가늘고 날카로운 꼬챙이를 손톱 밑으로 찔러 고통을 주었던 고문 방법.

고문의 흔적.

▶상자고문

상자 안쪽에 날카로운 못을 박아 놓고, 사람을 상자 안에 집어넣어 마구 흔들어 
못에 찔리게 하여 고통을 주는 고문 도구.

▶벽관고문

꼼짝할 수 없이 좁은 공간에 사람을 감금하여 앉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고통을 주었던 고문도구.
벽에 서 있는 관이라 하여'벽관'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징벌방

벌을 주기 위해 사용했던 24㎡ 넓이의 감방으로 12 옥사 안에 3개의 방이 있다.
빛이 차단되어 '먹처럼 깜깜하다고 하여 일명'먹방'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중앙사

옥사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중앙 간수소 건물로 10, 11, 12 옥사와 연결되어 있으며,
1920년도 중반에 2층으로 지어졌다.
1층은 간수들의 사무공간으로 사용하였고 2층은 수감자들을 모아 교육하는 강당으로 사용하였다. 

중앙사 출입구.

1층 사무공간.

미결수와 기결수의 수인복.

▶밥 찍는 틀

수감자들의 밥을 펐던 밥틀도 밥량을 조절할 수 있도록
받침대의 두께가 각기 다르게 되어 있다.

▶옥사

서대문형무소는 조선총독의 관리 하에 있는 기구였으며, 
형무소장은 총독의 명령을 받았고 형무소의 설치나 폐지도 총독의 권한에 속하였다고 한다. 
중앙사에서는 형무소 조직기구와 감시도구 그리고 재소자들의 하루 일과 등 
전반적인 형무소 생활에 대하여 알아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11옥사.

10옥사.

▶도산 안 창호[ 島山 安昌浩 ]

일제강점기 애국계몽 활동을 전개하고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로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나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했으며 공부를 마친 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1907년 신민회를 조직,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결성하였다. 
1926년 2월 상하이로 돌아와서 만주에 흩어진 군사 활동을 통일하여 대독립당을 결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민족운동의 이념과 노선이 통일되지 못해 실패로 끝났다. 
1932년 4월 윤봉길의 폭탄투척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4년형을 선고받은 뒤 가출옥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다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가 1937년 12월 24일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경성대학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이듬해 3월 10일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다.

▶몽양 여운형[ 夢陽 呂運亨 ]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 중국 난징 금릉대학을 중퇴, 
1918년 상하이에서 신한 청년단을 조직하여 러시아와 만주 등지에서 활약했다. 
1919년 조선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고, 같은 해 11월 일본에 가서 
일본 정부 요인 및 외국인 기자들에게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다. 
1930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나가사키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3년 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9월 조선 농구 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1934년 조선체육회 이사로 취임하여 한국 스포츠 발전을 위해 노력했으며, 
1942년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체포되었다가 예심 8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조선 체육회 초대회장을 지내며 정치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에서 피살되었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다.

소나무 뒤로 안산의 모습이 보인다.

11옥사 외부.

감방 환기구.

우측 공작사.

일제강점기 각 형무소에는 재소자들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형무소, 군부대, 관공서 등지에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공급하던 공장으로 이곳에서 재소자들은 강제노역과 인권유린에 시달려야 했으며, 
1930년대 후반 이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군수물품을 만들어 공급하기도 하였다.

최초 사형장이 있던 곳.

▶망루

망루는 수감자들의 탈옥을 막고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높이는 10m이다. 
총 6개 중 현재는 정문과 배면담장 2곳만 남아 있다. 
망루의 8면에는 감시창이 설치되어 있고 정문의 망루는 1923년에 
뒤쪽의 망루는 1930년에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한센병사에서 바라본 전경.

▶한센병사

한센병에 걸린 수감자를 따로 수용한 건물로 1923년쯤 지어졌다. 
건물 안의 앞쪽에 복도가 있고, 그 뒤로 작은 감방 2개와 큰 감방 1개가 있다.

 165명의 순국선열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 

▶통곡의 미루나무

애국지사들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하는 
원통함에 이 나무를 붙잡고 통곡했다고 하여 ‘통곡의 미루나무’로 불리게 되었으며,  
2020년 태풍으로 쓰러져 그 생을 다했다.
현재 이나무는 방부 처리하여 사형장 앞쪽에 보존 중이다.

 

통곡의 미루나무에 관하여 : https://blog.naver.com/cha/

사형장 입구.

▶사형장

사형을 집행했던 곳으로 지상 1층과 지하 1층의 일본식 목조건물로 
1916년 즈음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사형장은 5m 높이의 담장으로 둘러싸고 있어 
서대문형무소 안에서도 보이지 않게 차단되어 있다. 
1층 안에는 교수형을 집행하기 위해 여닫히는 마루판과 교수형에 쓰는 줄, 
가림막 뒤쪽에 마루판을 밑으로 내리는 장치가 있다. 
마루판 아래의 지하실은 시신을 수습했던 공간이다.

사형장 내부.

사형을 집행할 때 마루판을 밑으로 내리는 장치.

▶시구문

일제강점기에 사형 집행 후 시신을 바깥의 공동묘지로 내보내기 위해 밖으로 연결한 통로이다. 
붕괴되었던 것을 1992년에 독립공원을 만들 때 발굴하여 40m를 복원하였는데 
원래 길이는 약 200m라고 전해진다. 
일제는 시신에 구타나 고문의 흔적이 많은 경우, 사형 사실이 알려져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길 우려가 되는 경우, 시신을 받아갈 유족이 없는 경우에 
이 문을 통해 시신을 바깥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격벽장

수감자들이 햇볕을 쬐거나 간단한 운동을 했던 운동장으로 1920년대에 만들어졌다. 
운동할 때 대화하거나 도주하는 것을 막으려고 격벽을 세워 수감자들을 분리하고 감시했으며 
전형적인 원형 감옥 구조인 부채꼴 모양으로 만들어졌고, 
가운데에 높은 간수 감시대를 세워 손쉽게 수감자를 감시하고 통제하였다. 
해방 이후 철거되었던 것을 2011년에 원래 위치에서 약 20m 떨어진 이곳에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전경.

▶창고

서대문형무소 운영에 필요한 물품과 집기 등을 보관하던 건물이며 
1910년대 후반 처음 지었을 때, 길이가 23m였는데, 수감 인원이 늘어나고 
옥사가 확장되면서 세 차례 증축하여 53m로 늘어났다. 
해방 후에는 창고뿐만 아니라 강당, 작업장, 의무실, 욕실 등으로 일부를 쓰기도 했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이전한 후 철거되었던 것을 2019년에 복원했으며, 
복원할 때 발견한 배수관로와 물을 모으는 시설인 집수정의 유구 등을 보존하고 있다.

▶여옥사

여성 미결수를 가뒀던 구치감으로 1916년 즈음 지어졌다가 1979년에 철거되었던 것을 
2011년에 복원했으며, 여성독립항일운동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일제강점기에 여성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갇혀 고난을 겪었던 곳으로,
여옥사 8호 감방은 1920년 3월 1일에 3.1 운동 1주년 옥중 만세 투쟁이 펼쳐졌던 현장이다.

이곳 8호 감방은 1920년 3월 1일에 3.1 운동 1주년 옥중 만세 투쟁이 펼쳐졌던 현장이다.

버선과 고무신.

여옥사를 나오며 관람을 마무리한다.

관람을 통하여 근대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을 수 있었던 시간으로
역사를 통해 우리의 뿌리를 확인하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야 할지를 배우게 되었다. 
다시 한번 순국선열께 경의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