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릉은 조선 6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 씨의 능이다. 1521년(중종 16) 정순왕후가 노산군 부인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묘는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시댁 해주 정씨의 집안 묘역인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고, 해주 정씨 집안에서 제사도 지내주었다 한다. 1698년(숙종 24) 정순왕후로 복위되면서 능의 이름을 사릉이라 하고 묘를 왕릉 제도에 맞게 다시 조성하였다고 한다.
[사릉 가는 길] 경춘선 금곡역 건너편 버스정류장 : 23, 55, 64, 땡큐20, 땡큐30, 땡큐60번 버스 이용. 경춘선 사릉역 : 땡큐60번 버스 이용. 버스정류장 명칭 : 세계유산 조선왕릉 사릉. 송능2리 적성골입구 → 하차 후 사릉 방향 도보 10분.
[사릉 입장료] 입장료: 1, 000원. 지역주민 50% 할인. 문화가 있는 날 무료.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장애인, 국가유공자, 임산부, 다자녀부모, 한복 착용 무료. 만 24세 이하 및 만 65세 이상 무료. (신분증 및 관련 증명서 제시) 매주 월요일 휴무. (휴무일이 공휴일과 겹칠 경우 다음날 휴무)
[사릉 숲길 개방기간] 5월 16일 ~ 6월 30일까지. 10월 01일 ~ 11월 30일까지. 매주 월요일 휴무.
사릉 입구의 모습이다.
종합안내도.
▶조선왕릉 유네스코 등재 기념비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조선왕릉 40기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00여 년간 이어진 왕조의 능이 단 한 곳도 훼손되지 않고 모두 남아있다는 점과 조선왕릉의 높은 문화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2009년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사릉 사적 제209호.
사릉 출입문 전경.
▶금천교
제일 먼저 금천교가 시야에 들어오며 이곳 금천교는 왕비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으로 들어가는 다리로 금천교를 건너면 성스러운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같게 된다.
남양주 사릉에 심어진 소나무들은 단종이 묻힌 강원도 영월의 장릉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자란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사릉은 특기하게 홍살문에 서면 정자각에서 능침까지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홍살문
홍살문은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 지붕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운 형태로, 중앙에는 삼 태극무늬가 있다. 나무 기둥과 살에는 붉은 칠을 하여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알림은 물론, 붉은색은 악귀를 내쫓는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참도
홍살문 앞에서부터 정면의 정자각까지 박석을 깔아 만든 긴 돌길이 이어지는데 이 길을 참도라고 한다. 참도는 혼령이 이용하는 향로(향과 축문)와 참배자(왕 또는 제관)가 이용하는 어로로 구분된다. 좌측의 향로가 능의 주인인 신이 다니는 길로 우측의 어로보다 약 10센티미터 정도 높고 넓다.
▶판위(배위)
왕이 제례 시에 홍살문 앞에 내려서 절을 하고 들어가는 곳으로 배위 또는 판위라고 한다. 가로세로 약 1.8미터 정도의 네모난 판위가 있다. 여기에서 혼백을 부르며 4배 한다. 조선왕릉은 우측에 있으나 황제릉의 판위는 좌측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의 참도는 정자각까지 이어지지 않고 중간에 중단되어 있다. 마치 정순왕후의 안타까운 삶을 보듯 애처롭게 만 느껴진다.
▶수복방
수복방은 능역 내 봉분과 시설물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정한 일들을 적발하기 위해 왕릉을 지키는 수직군 또는 수복이 돌아가며 휴식을 취하던 건물로 정자각의 동편에 위치한다. 방의 규모는 1~3칸으로 수라간과는 달리 온돌방을 갖추고 있다.
▶수라간
조선 왕릉 정자각의 서편에 위치한 건물로 제사를 지내기 전에 재실의 전사청에서 만들어 온 제물을 제기에 담는 곳으로 전찬배설청(奠饌排設廳)이라고도 한다. 왕릉에서 행해지는 제향에서 제물은 수라간에서 미리 차린 후 서쪽 협문을 통해 진설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수라간은 정자각을 중심으로 향어로의 서편에 위치한다.
▶비각
왕의 행적을 적은 신도비나 표석을 보호하는 건물.
▶표석
비각 내에 있는 사릉 표석은 1771년에 건립되었다. 비각 안에는 ‘조선국 정순왕후 사릉(朝鮮國 定順王后 思陵)’이라고 새겨진 표석이 있다.
▶정자각
정자각은 맞배지붕으로 배위청이 짧아서 전체 건물의 모습이 정(丁)자형보다 정사각형이라는 느낌을 준다. 정자각 배위청 기둥이 한 면에 대개는 3개인데, 사릉은 2개로 짧다.
▶정자각 계단
정자각 계단은 정면에 두지 않고 측면에 만들었다. 이는 해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떠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섭리를 건축물에 활용한 것이라고 한다. 왼쪽은 신이 오르는 신계와 오른쪽은 왕과 왕세자가 오르는 어계로 구분되어 있다.
▶주근도배
붉은 기둥의 아래에는 흰색과 위에는 푸른색으로 주근도배(柱根塗褙)를 칠하였다. 하얀색은 구름을 상징하고 파란 테두리는 하늘을 상징한다. 정자각을 멀리에서 보면 하늘(구름)에 떠있는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하여 운상각(雲上閣)이라고도 한다. 이는 '구름 위는 신들이 노니는 공간으로 정자각이 천국에 있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라고 한다.
사릉 재향 일정 : 매년 7월 17일(양력)
정청 내부에는 제수를 진설하는 제상과 관세상, 준상 등이 진열되어 있다.
▶서쪽 정자각 계단
제례를 마친 제관들이 계단을 내려와 북서쪽에서 제례를 끝낸다는 의미로 지방을 불사르고 제물을 예감에 묻는다.
▶예감
제향에 사용된 축문을 태워서 묻는 돌구덩이. 망료: 제사가 끝나고 축문이나 지방이 불에 다 탈 때까지 지켜보는 일.
특이하게도 예감의 뚜껑이 조각된 석재로 만들어져 있다.
▶신교
제향을 받은 혼령은 신문을 나와 신교를 건너 신로를 따라 능침으로 돌아간다.
▶정순왕후
조선 6대 국왕 단종의 왕비로 정순왕후 송 씨는 본관이 여산인 여량부원군 송현수와 여흥부부인 민 씨의 딸로 1440년(세종 22) 전북 정읍 태인(현 정읍시)에서 태어났다. 1454년(단종 2)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다음 해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남겨주고 상왕이 되자 의덕왕대비가 되었다. 그러나 1456년(세조 2)부터 계속해서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나면서 사육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제거되자 1457년(세조 3) 단종은 노산군으로 신분이 낮아져 영월로 유배되었고, 정순왕후도 군부인으로 신분이 낮아져 현재의 동대문 밖 정업원에서 생활하였다 한다. 정순왕후는 15세에 왕비가 되었다가 18세에 단종과 이별하고 평생 혼자 살았던 비운의 왕비이며 단종이 죽은 후엔 무척이나 슬퍼해 매양 앞산에 올라가 영월을 바라보며 통곡하며 세월을 보내다 1521년(중종 16) 82세로 세상을 떠났고, 1698년(숙종 24) 단종이 왕으로 신분이 회복되자 정순왕후도 왕비의 신분을 회복하였고, 시호를 정순왕후라 정한 후 종묘에 신주를 모셨다 한다.
단종의 가계도.
▶사릉
사릉은 대군부인 예로 장사 지낸 뒤 왕후 능으로 추봉 되었으므로 다른 능에 비해 단출하게 꾸며져 있다. 능의 좌향은 북북동에서 남남서 방향을 바라보는 계좌정향 형태다. 능침을 3면 곡장이 둘러싸고 있으나 병풍석과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았으며 봉분 앞에 석상 1좌, 석상 양측에 망주석 1쌍을 세웠다. 봉분 주위에는 석양, 석호 각 1쌍이 배치되어 있다. 아랫단에는 문인석, 석마 각 1쌍과 장명등이 있다.
사릉이라는 이름도 정순왕후가 단종이 머무는 영월을 바라보며 일생을 보냈다는 의미에서 생각할사(思), 언덕 능(陵)을 사용해 사릉이라고 한다.
▶정자각 추녀마루 위에 잡상
정자각 추녀마루 위에 있는 용두와 잡상들이다. 대부분의 왕릉 정자각에는 용두 외 잡상이 3개가 올라간다. 보통 맨 뒤가 용두이고 앞에서부터 삼장법사(대당사부), 손오공(손행자), 저팔계 순이다.
이제 개방된 숲길을 걸어 보기로 한다.
숲길 개방 안내도.
숲길은 능 주변을 돌아오는 길로 약 30분 정도 소요된다.
숲길에 있는 모든 것들은 소박하고 단순하며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금낭화
원산지는 중국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양귀비과의 여러해살이풀에 속한다. 고산지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금낭화는 등모란, 며느리 주머니, 며눌취라 불리는 풀이며 아치형으로 활대처럼 곧게 뻗은 꽃대에 아이들 복주머니 모양의 진분홍색 꽃들이 주렁주렁 달린 꽃이다. 또한, 금낭화의 전설로는 옛날 어느 한 왕자가 한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한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소녀는 왕자의 청혼을 거부하였고, 왕자는 소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선물 공세를 하며 청혼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끝끝내 왕자를 거부하자 왕자는 실망하여 자신의 가슴을 찔러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 후에 그 자리에서 핀 꽃이 금낭화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한적하고 조용한 소나무 숲길, 바람은 솔향기를 실어 천천히 지나가고 걷는 걸음마다 세상의 소란은 멀어져 오롯이 나 자신과 마주하는 고요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은은한 솔내음이 내 코끝을 자극시킨다.
사릉에는 유난히도 두릅이 참 많이 자생한다.
사릉의 숲길은 고도의 차이가 없는 평탄한 흙길로 조성되어 있다.
정순왕후가 잠들어 있는 능의 뒷배경이다.
▶정미수의 묘(1456(세조 2) ~ 1512(중종 7))
1456년(세조 2년)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해주, 자는 기수(耆叟)이다. 아버지는 영양위에 봉해진 정종이고, 어머니는 문종의 적녀인 경혜공주이다. 그의 나이 2살 때 외숙부 단종이 영월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정종이 처형된 후 7살 때인 1462년(세조 8년) 어명으로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들어왔다. 일반적으로 역신의 가족들은 대명률에 따라 연좌되어야 하나, 세조의 특명으로 경혜공주와 정미수는 연좌를 면하였으며, 직위까지 모두 회복하였다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해평부원군에 책봉되기도 했다. 1512년(중종 7년) 음력 4월 15일 향년 5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둥굴레 군락지.
숲길을 걷다 보면 해주 정씨의 묘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진입로도 조성되어 있지 않고 묘소의 관리도 그리 썩 좋아 보이진 않은 모습이다.
▶진산군부인 류씨 묘터
이곳은 조선 11대 중종과 숙의 홍 씨의 아들 해안군의 첫번째 부인 진산군부인 류 씨의 묘가 있었던 자리이다. 진산군부인은 본관이 진주인 류홍의 딸로 해안군과 결혼하였으나 자식을 낳지 못하고 27세로 세상을 떠났다. 1983년 전주 이씨 해안군파 종친회에서 진산군부인 묘를 경기 고양시에 있는 해안군묘 옆으로 옮겼고 기존에 있던 석물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현재 묘터에는 묘 표석, 상석, 문석인, 망주석, 향로석 등의 석물이 남아 있다.
진산군부인 류씨 묘터를 마지막으로 숲길을 내려선다.
사릉 역사박물관.
재실로 가는 길.
▶재실
재실은 제례에 앞서 제관들이 미리 도착하여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제례를 준비하는 곳이다. 평소에는 참봉 등 관리가 이곳에 상주하면서 능역을 돌보았다. 주요 시설로 재실 외에 향을 보존하는 안향청, 제례 업무를 주관하는 전사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행랑채 등이 있으며 단청은 하지 않았다.
사릉은 강원도 태백산맥에서 자생하는 수령 200년 이상 춘양목의 우량한 종자로 묘목을 생산하여 궁궐과 왕릉에 식재하고, 장기적으로는 고건물 복원 및 보수용 목재를 공급하는 전통수목 양묘장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작약.
꽃창포.
사릉을 한 바퀴 돌아보며 천천히 걸음을 마무리한다. 고요한 숲길 사이로 스며든 바람과 오랜 시간을 품은 능의 풍경은 마음속까지 잔잔한 여운으로 남는다.
계절은 또다시 흐르겠지만 오늘 이 길에서 마주한 평온함만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머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