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기념관은 조선 세종대왕을 기념하는 전시관으로 동대문구 회기동에 위치해 있다.
조선 세종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하고 보존하기 위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1970년 11월 준공하고 1973년 10월 개관하였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현대식 건물로, 전시실, 강당, 연구실, 자료준비실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전시관은 한글실, 과학실, 국악실, 일대기실, 옥외 전시로 구성된다.
한글실은 세종 당시 펴낸 도서류를, 과학실은 조선 시대의 과학에 관련된 자료로
금속활자 판자기, 측우기, 천문도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국악실은 각종 국악 악기류를 전시하고 있다.
일대기실은 세종대왕의 어진과 김학수가 수년 동안 그린 세종대왕 일대기 그림이 전시되어 있어
세종의 치덕을 살펴볼 수 있다.
옥외에는 세종대왕신도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와 구영릉석물(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수표(보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가는 길]
1호선 청량리역 하차 2번출구로 나와 홍릉방향 도보 15분
6호선 고려대역 하차 3번출구로 나와 도보 10분
1126, 201, 273번 이용 세종대왕 기념관 하차.
[관람 시간]
평일 : 오전 9:00 ~ 오후 6:00
주말 및 공휴일 : 오전 9:00 ~ 오후 7:00
[박물관 입장료]
성인 : 5,000원
어린이 및 청소년 : 3,000원
단체 할인 : 20인 이상 단체 예약 시 10% 할인
세종대왕 기념관 가는 길.
세종대왕 기념관 안내도.
기념관 정문.
신도비를 보호하는 비각.
▶세종 영릉 신도비(世宗 英陵 神道碑)
영릉은 1450년 6월 태종의 헌릉 서쪽 기슭에 조성되었다.
영릉신도비는 공조판서 정인지와 중추원부사 김조가 왕명을 받들어
각각 비문과 비음기를 짓고 세종의 제3왕자인 안평대군이 글씨와 전액을 써서
1452년(문종 2) 2월 능상 아래에 건립하였다.
3월에는 비각이 완성되었다. 1469년(예종 1) 3월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영릉을 여주로 천릉하고 7월에는 구 영릉에 남아 있던 신도비와 잡상을 땅에 묻었다.
1973년 3월 이화여대 박물관팀이 백색 대리석 한 덩어리로 만들어진 비신(비의 몸체)과
이수(비석의 머리에 새긴 두 마리 용 모양)를 발굴하였으나 귀부(거북이 모양의 받침돌)는
끝내 찾지 못하였고 이에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
세울 때 자연석을 비신 받침돌로 삼았다.
1999년 2월 귀부를 새로 제작하여 그 위에 비신과 이수를 다시 세웠고
2004년 6월 비각을 건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보물 제1805호로 지정되었다.
비신과 이수의 높이가 4.5m로 매우 높고 앞뒤에는 2마리의 용이 서로 마주 보며
여의주를 다투는 쌍룡쟁주의 모습이 장식되어 있다.
안평대군의 글씨는 마모되어 찾아볼 수가 없다.
이수의 가운데 전액에는 ‘세종영릉지비(世宗英陵之碑)’라는 6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으나 글씨가 희미하게 보인다.
기념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현대식 건물로, 전시실, 강당,
연구실, 자료준비실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전시관은 한글실, 과학실, 국악실, 일대기실, 옥외 전시로 구성되어 있다.
▶세종대왕 동상
덕수궁 중화전 동쪽 광장에 있던 것을 세종대왕 탄신 615년 을 맞이하여
2012년 7월 17일에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우측으로 석물들이 일자로 진열되어 있다.
▶구영릉 석물(舊英陵 石物)
세종대왕기념관 경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물로 총 13기이다.
석물들은 능을 여주로 옮길 때 운반이 어려워 땅에 묻었는데,
1973∼1974년에 다시 발굴하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해 놓았다.
현재 석양상과 석마상이 2기씩 남아 있고, 망주석은 1기의 일부만 남아 있다.
장명등과 석인상은 다 갖추어져 있으며 장명등은 개석이 없어진 상태이다.
신도비는 이수와 비신 만 발굴되었고 혼유석은 동쪽 부분이 절단된 상태이다.
고석은 1기, 난간주석은 모두 7기가 남아 있다.
1980년 6월 11일 서울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무석인과 석먀.
문석인과 석양.
장명등은 윗부분이 없어졌고 혼유석과 혼유석을 받치는 4개의 고석은 1개만 있다.
문석인과 석양 그 뒤로 축석을 받쳐주는 동자석주 2개가 있다.
무석인과 목이 잘린 석마가 자리 잡고 있다.
그 옆으로 주시경 스승의 묘비가 있다.
▶주시경 스승 묘비
1959년 한글 학회가 은평구 신사동에 안장된
주시경의 묘를 경기도 양주로 옮기면서
최현배가 짓고 정인승이 쓴 한글 묘비를 건립했는데
1981년 12월 12일 국립묘지 유공자 묘역으로 옮겨질 때
묘비와 석물은 그대로 두었다가 2008년 7월에
세종대왕 기념사업회와 한글학회가 이곳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와
다시 세운 것이다.
▶주시경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국어학자이자 교육자이다.
주시경은 우리 민족이 자주권을 지키려면 우리말을 잘 알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그는 신식 학교인 배재 학당에 입학해 공부하는 중에도 우리글을 연구했다.
당시 배재 학당 교사로 있던 서재필의 신임을 받아 한글로 된 《독립신문》의
교정을 맡기도 했다.
1910년에 한일 강제 병합으로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그는 《국어사전》을 편찬했다.
일제의 무단 통치로 국내에서 민족 운동이 힘들어지자 주시경은 중국 망명을 준비하든 중인
1914년에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세종성왕 기념탑
세종성왕의 마음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7년 10월에 세운 세종성왕기념탑이다.
한글 조형물.
▶자격루 (물시계)
이 물시계는 물통(파수호)에 물을 담아 물 받는 통(수수호)에 물이 드는 대로
'자'가 떠올라서 자의 눈금을 가지고 시간을 알도록 한 것이다.
물시계의 역사는 이미 신라 성덕왕 때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세종 20년(1438)에는 더 정밀한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 물시계는 중종 31년(15836)에 주조된 것으로
현재 덕수궁에 보전되어 있는 것을 1/2로 줄여서 만든 것이라 한다.
▶오목해시계(앙부일구)
앙부일구,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는 세종 대왕 때 만든 해시계들인데,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 해시계인 앙부일구는 세종 16년(1434)에 처음 제작하였으며
시반, 영침, 받침대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고, 둥근 시반에는 절기선과 시각선이 그려져 있다.
절기선을 이용하여 날짜를 읽고, 시각선을 이용하여 시간을 읽는다.
▶측우기
측우기는 비가 온 양을 재는 기구로서 1441년(세종 23)에
당시 세자인 문종에 의해 창안되어 1442년(세종 24)까지
과학기술자들이 제작한 세계 최초의 우량계이다.
금속제 원통형 그릇에 빗물을 받아 표준화된 눈금의 자로 그 깊이를 측정했으며,
같은 규격의 기구와 자를 서울의 천문관서와 지방의 관아에 설치하여
전국적으로 우량 관측 및 보고 체계를 갖추었다.
이 측우기는 헌종 때의 측우기와 관상감측우대를 복원 제작하여 차재경 님이 기증한 것이다.
보물 제838호로 지정된 수표 표석.
▶서울 청계천 수표 (淸溪川 水標)
조선 후기에 하천수위를 측정하던 기구로 높이 3m. 너비 20㎝. 화강석으로 된
부정육면방추형의 돌기둥인데 위에는 연꽃무늬의 머릿돌이 놓여 있고
밑은 모가 난 초석으로 땅 속에 박혀 있다.
돌기둥에는 양면에 주척 1척마다 눈금을 1척에서 10척까지 새겼고
3척, 6척, 9척 되는 곳에는 ○표를 파서 각각 갈수, 평수, 대수 등을 헤아리는 표지로 삼았다.
6척 안팎의 물이 흐르는 것이 보통의 수위였으며 9척 이상이 되면 위험수위를 나타내어
개천의 범람을 예고하는 데 쓰인 것이다.
이 수표는 원래 수표동 수표교 옆에 설치되었던 것이며,
세종대 마전교는 바로 이 수표교 자리에 있었던 다리였는데 수표가 세워지면서 수표교라 불리었다.
이 수표는 1960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에 수표교와 함께 옮겨져 있다가
1973년 세종대왕기념관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야외 전통혼례를 올리는 '청례대중궁'이다.
기념관 내부의 모습이다.
세종대왕박물관 1층 로비 벽면에 훈민정음이 새겨져 있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여러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다.
▶세종대왕(世宗大王)
세종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1397년(태조 6) 준수방 본궁에서 태어났다.
1408년(태종 8) 충녕군에 봉해졌고, 1412년(태종 12)에 충녕대군이 되었다.
1418년(태종 18) 큰형 양녕대군이 왕세자 자리에서 폐위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두 달 뒤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세종은 재위기간 동안 혼천의 등 과학기구를 발명하였고,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으며
4군 6진을 개척하여 조선의 국경을 확장하였다.
또 여러 활자를 제조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고, 국가의례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1446년(세종 28)에는 우리나라 고유 문자체계인 훈민정음(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창제하는 등 정치·경제·문화·과학·군사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이후 1450년 영응대군 사저인 동별궁에서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종대왕기념관 궁중의례원에서는 궁중혼례, 전통혼례, 야외웨딩, 생일잔치등으로 이용된다.
신랑 신부가 탈 사인교.
두분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세종대왕기념관 궁중의례원 : http://www.sjwed.co.kr/
서울에 살면서 세종대왕기념관은 처음이다.
세종대왕의 업적에 비해 기념관은 생각보다 규모가 작아서 의아해했다.
그러나 발명품과 석물, 신도비, 전통혼례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
은근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관람하였다.
또한 인근 영휘원과 숭인원 그리고 홍릉숲, 천장산 하늘길 등 함께 관람할 요소들이
주위에 있어 서로 연결하여 관람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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