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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둘레길

서울 둘레길 20코스의 모든 것 (북한산 강북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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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둘레길 20코스는 북한산의 강북구를 걷는 구간으로
'묘지 앞에 나라를 생각하는 길'이라는 테마로 이준열사묘와 광복군 합동 묘소, 
국립 4·19 민주묘지 등 곳곳에 서린 순국선열과 민주열사의 애국정신을 
다시금 새기고 조국과 민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 도보길이다.
북한산 둘레길의 3코스 흰구름길, 2코스 순례길, 1코스 소나무숲길과 같은 길을 걷는다.
서울 둘레길 20코스 강북코스는 7,1km로 약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서울 둘레길 21개 코스

▶서울 둘레길 20코스 안내도

오늘의 코스는 화계사 입구 - 이준열사 묘역 - 4,19 국립묘지 - 솔밭그린공원 - 북한산 우이역 순으로 이어간다.

서울 둘레길 20코스를 가기 위해서는 우이 경전철 화계역 2번 출구로 나와야 한다. 

2번 출구에서 나와서 왼쪽으로 돌아서 큰길 따라 10여 분 가면 
화계사 일주문이 자리 잡고 있다.

화계사 일주문.

일주문 옆 스탬프 함.

길을 건너 계단을 시작으로 20코스의 여정은 시작된다.

멧돼지로부터 인간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철망을 설치해 놓은 것으로
산행 시 꼭 철문을 닫고 가기를 부탁드립니다.

사유지로 인해 우회길을 이용하도록 화살표로 표기해 놓았다.

 

맨발 산책로.

서울 둘레길과 북한산 둘레길을 같이 사용하는데
이런 좁은 길은 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길에 우측으로 연리지가 눈에 들어온다.

"글쎄" 연리지의 설명이 있는데 별로 신빙성은 없는 것 같다.

연리지.

인왕산에 있는 연리지다. (모양이 많이 흡사하다)

본원정사 밑에 있는 자비정사.

▶본원정사

본원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대각회 소속의 사찰이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미륵불 사이인 부처님 없는 시대에 
중생들을 교화하는 대비보살이다. 
본원정사 창건주비구니 손덕선공덕비에 의하면 비구니 손덕선 스님이 
지금의 자리에 도성암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사찰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본원정사는 조선말기 부터 있던 도성암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또한 한때 도선사보다 많은 신도들의 기도행렬이 이어지던 곳이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조선말기 부터 사찰이 있던 이곳에 손덕선 스님이 머물면서 중창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 후 손덕선 스님이 연로하여 사찰을 유지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 폐사직전에 이르렀던 것을 
1980년대 초 원성스님이 주지소임을 맡게 되었다. 
이후 스님은 절 이름을 본원정사로 바꾸고 불사를 일으켜 대웅전과 명부전, 나한전 등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1996년 5월 22일 인근에 있는 삼성암, 화계사로 이어진 연쇄 방화사건으로 
대웅전과 나한전이 모두 불타고 말았다. 
그러던 것을 1999년 대웅전과 나한전 자리에 대적광전을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마애삼존불과 대적광전 내부. 

도로를 따라 약 100m 정도 내려온다.

현인 요양병원 앞에서 도로를 건너간다.

통일교육원 후면을 옆으로 끼고 간다. 

북한산 둘레길 흰구름길 구간 아치를 나온다.

통일교육원 후문을 나와 4,19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곳에서 좌측으로 울라 선다.

통일교육원을 지나~

▶국립통일교육원

1972년 5월 통일연수소로 발족하여 1978년 1월 통일연수원으로 개칭하였고, 
그 뒤 1996년 12월에 통일교육원으로 개칭하였다.
주요 기능은 통일문제 및 국민정신교육에 관한 전문가와 교육자의 훈련 및 양성, 
통일에 대비한 정부기관·공공기관·사회단체의 간부 및 요원에 대한 교육의 실시 등의 
운영을 담당한다.
그리고 통일정책 및 국민정신교육상 특히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자에 대한 교육의 실시, 
통일문제 및 국민정신문제에 관련되는 교육에 관한 연구 및 자문, 
통일문제 및 국민정신교육상 필요한 전시시설의 운영 등을 담당한다.

통일교육원을 건너 북한산 둘레길 순례길구간으로 들어선다.

이준열사 위훈비.

이준 열사 묘지로 들어서는 입구에 있는 홍살문.

묘역 올라가는 길이 미끄러워 가운데로 야자매트를 깔아 놓았다.

▶자유평화수호의 상

이 자유평화수호의 상은 이준 열사기념사업회에서 1963년 10월 4일에 세운 것이며
1992년 3월 25일에 북청군민회 부회장 차동수 여사의 성금으로 보수가 이루어졌다 한다. 

생전 자필문구를 비석화하여 중간중간 만들어 놓았다.

▶이준 열사 (1859~1907))

이준 열사는 1907년 을사늑약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 등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압력과 방해로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1907년 7월 14일 
숙소였던 융 호텔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그는 숨을 거두며 "나라를 구하시오. 일본이 끊임없이 유린하고 있소"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의 시신은 헤이그 서쪽 외곽에 있는 니우 에이컨다위넌 시립 공동묘역에 묻혔다가 
사후 56년이 되던 해인 1963년 헤이그의 옛 무덤 자리에는 흉상과 함께 
고국으로 운구하여 수유리에 안장됐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의사, 열사, 지사의 차이점

이 세 단어는 모두 사람의 마음이나 행동을 나타내지만, 그 의미와 맥락은 다릅니다.

1, "의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항거하다가 의롭게 죽은 사람.
      성패에 관계없이 무력으로써 적에 대한 거사를 결행하신 분으로 군인은 제외.
      예)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등

2, "열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저항하다가 의롭게 죽은 사람.
      주로 맨몸으로 싸우다 죽은 분을 가리킬 때 쓴다.
      혹은 직접적인 행동 대신 강력한 항의의 뜻을 자결로서 굳은 의지를 드러낸 분.
      예) 이준 열사, 유관순 열사, 이한열 열사, 박종철 열사 등

3, "지사"는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 건국포장 또는 대통령 표창을 받은 자를 지칭한다. 
      예) 애국지사 (이미 세상을 떠난 애국지사는 순국선열이라고 칭한다)

이준 열사 묘비.

이준 열사 위훈비 뒤로 다리를 건너 가인 김병로 선생의 묘로 이어간다.

김병로 선생의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에서 170m 정도 올라간다.

▶가인 김병로 선생 (1887.12.15. ~ 1964.1.13)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은 청년 의병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독립운동가들과 농민, 노동자들을 위해 변호하였으며 좌우로 나뉘어 있던 
두 세력의 통합을 위해 신간회에 가입하고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광복 후에는 1948년 초대 대법원장에 취임한 후 9년 3개월간 역임하였으며 
이승만 대통령과 친일파 처벌 등으로 갈등을 빚으며 사법권의 독립과 
재판의 독립성을 위해 싸워왔던 분이다.

이시영 선생의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에서 130m 정도 올라가면
광복군 합동묘소 터와 이시영 선생의 묘소가 있다.

광복군 묘소 이정표와 그 뒤로 이시영 묘소가 보인다.

▶광복군 합동묘소

한국광복군으로 중국 각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17명의
합동 묘소로 광복군동지회에서 1967년 조성하였으며 2021년 2월 24일
국가보훈처에서 국가관리묘역으로 관리하다가 광복절 제77주년 
(2022년 8월 14일)에 모두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하였다.
현재는 묘소 터만 남아있는 상태다.

▶이시영 선생 (1869~1953)

1905년 그가 대한제국 외부 교섭국장에 임명되던 때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외부 교섭국장에서 사직하였다가 1906년 다시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 돼 
관직 생활을 하던 이시영은 이후 한성재판소장, 고등법원판사 등 법무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1907년 안창호, 전덕기, 이동녕과 친형 이회영 등이 국권회복을 위하여 비밀리에 
신민회를 조직할 때에 함께 참가하기도 했다. 
이후 이시영은 형 이회영 등 6형제와 함께 전 재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자리를 잡고 독립운동 기지로서 경학사와 무관학교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신흥강습소는 신흥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여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하는데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1919년 안창호, 이동녕 등과 함께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여기서 그는 법무총장과 재무총장을 맡으면서 임시정부의 자금을 관리하는 중요 업무를 담당하였다. 
임시정부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면서 한국노병회, 한국독립당 참여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다시 삼거리로 내려와 길을 이어간다.

음식점이 있는 다리를 건너 근대화 기념관으로 들어선다.

▶근현대사기념관

동학운동부터 3·1 운동, 4·19 혁명으로 이어지는 근현대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전파를 위해 국립 4.19 묘지가 위치하는 북한산 자락에 건립되어 
2016년 5월 17일 개관하였다. 
근현대사기념관은 강북구 수유동에 소재하며 지상 1층에는 상설전시실과 수장고, 
지상 2층에는 기획전시실과 강의실, 열람실로 구성되어 있다. 
개항 이후 농민들이 봉기한 동학운동과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늑약으로 조선의 식민지화 과정이 사진과 그림으로 전시되며 
한국전쟁의 발발, 4.19 혁명의 전개 등 근현대사 자료를 전시한 곳이다.

 

근현대사박물관을 내려와 백련 2교를 건넌다.

북한산 대동문으로 오르는 길과 만난다.

삼거리 쉼터와 옆으로 주말농장이 있는 길을 따라간다. 

계단을 올라 따라가다 보면 강재 신숙 선생의 묘소로 가는 길을 만나게 된다.

강재 신숙 선생의 묘소로 오르는 길.

▶강재 신숙 선생 (1885 ∼ 1967)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천도교의 대표적 인물의 파견을 요청받았을 때 
선임되기도 했으며, 길림한국인회의 위원장에 당선, 피난민의 구제와 귀국의 알선 등으로 
교포의 권익보호에 진력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가는 길에 새들의 떼창이 들려온다.
제각기 내는 소리와 향기, 빛깔은 다르지만, 그들만의 살아가는 방법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우리도 자신의 자리에서 그 어떤 소리와 향기, 색깔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한 번쯤 뒤돌아 봄이 어떨는지..... 

▶보광사

보광사는 1788년(정조 12) 금강산에서 수도한 원담 스님이 
신원사를 창건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인해 소실되고 일부 건물만이 남아 법등을 겨우 이어 왔었다. 
그러던 것을 1979년 남산당(南山堂) 정일(正日) 스님이 포교의 원을 세우고 
이곳에 주석하면서 불사를 시작 하여 1980년 11월 보광사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스님은 가람을 일구어 오늘의 모습이 되도록 하였고, 
대승경전 산림 법회와 참선 법회를 정기적으로 열어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과 
선법을 전하여 스스로 바른길을 찾게 하였다. 
이로써 보광사는 스님의 발원대로 명실상부한 포교의 도량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한다.

보광사를 지나 4,19 전망대에 이른다.

▶국립 4,19 민주묘지

국립 4.19 묘지는 1960년 3·15 부정선거를 자행한 권력에 맞서다 1960년 4.19 혁명때
희생된 224분이 안장되어 있으며 그 동안 공원묘지로 서울시에서 관리해 오던 
4·19 묘지도 성역화 사업을 거쳐, 1995년 4월 19일(4·19 35주년)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전망대에서 본 4,19 민주묘지 전경.

북한산 둘레길 순례길 구간을 빠져나온다.

도로를 따라 내려서면 우이동 솔밭공원이다.

▶우이동 솔밭공원

소나무들이 자생하는 숲으로 도심의 자연공원으로 조성된 곳이다. 
서울 강북구 북쪽 삼각산(북한산) 자락의 주택가에 위치한다. 
소나무 숲을 없애고 아파트단지가 개발될 예정이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서울 강북구에서 매입하여 숲을 보존하기로 결정하고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우이동 솔밭공원의 규모는 약 1만여 평이며 소나무가 훼손된 빈자리에 
운동기구와 작은마당과 광장, 소산책로 등 시설물을 설치하여 공원화되었다.
솔밭공원의 소나무는 970그루 가량의 소나무가 모여 산다고 한다.

소나무 사이로 인수봉이 보인다.

▶우이동

우이동의 지명은 삼각산에 있는 소의 귀처럼 생긴 봉우리, 
소귀봉 또는 우이봉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오늘날 우이천, 우이령(소귀고개) 등에서 관련 지명을 엿볼 수 있다.
1911년 경성부 숭신면 우이리가 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편입되었다. 
1949년 동대문구에서 성북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성북구에 편입하여 우이동이 되었다. 
1973년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도봉구 관할이 되었다. 
1995년부터는 강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솔밭공원을 나와 연수원 담장 옆으로 올라간다.

여기서부터는 북한산 둘레길 소나무 숲길 구간이다.

북한산 둘레길 1구간 '소나무 숲길' 은 북한산에서 가장 많은 소나무를
볼 수 있어 '소나무 숲길' 로 불린다.

둘레길 옆으로 목이 잘린 문석인이 자리 잡고 있다.

소나무 쉼터.

망고강산 약수터 (음용불가)

소나무 숲길 구간을 빠져 나온다.

주택가 사이로 의암 손병희 선생의 묘소로 이동한다.

▶의암 손병희 선생 (1861.4.8 ~ 1922.5.19)

호 의암(義菴). 초명 응구(應九). 후명 규동(奎東). 충북 청주 출생으로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를 창립하고 보성, 동덕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 문화사업에 힘썼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에게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 수도에 힘쓰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도선사로 오르는 길과 만나게 되고 도로를 건너 만남에 광장으로 이동한다.

우이동 만남의 광장.

분수대는 시원한 물줄기를 쉼 없이 쏟아 낸다.

만남의 광장을 내려와 우이구곡을 만나 길을 따라 내려간다.

▶우이 제9곡 재간정

홍양호의 '우이동구곡기'에 따르면 9곡은 양 언덕이 밝게 트이고 물은 맑고 모래는 흰 곳으로 
몇 개의 기둥을 돌에 얹어 물가에 임한 것이 있는 이를 재간정이라 하였는데, 
현재는 재간정이 소실되었으며 인근에서 조선시대 집터의 유적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이곳 일대가 재간정이라는 별서가 있었던 9곡의 위치로 추정된다고 한다.

우이경전철 1번 출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도로를 따라 올라간다.

우이동 고개 우측에 스탬프 함이 자리 잡고 있다.

인증.

우이역 1번 출구로 다시 내려간다.

 

서울 둘레길 20코스는 북한산자락을 따라 걷는 숲길로 간간이 
북한산과 서울의 경관을 감상할 수 있으며, 곳곳에 자리한 전통 사찰, 
유적지 등 역사와 문화자원을 천천히 걸으면서 보고 느낄 수 있는 도보길이다.
특히, 국립 4·19 민주묘지와 그 주변에 이준 열사를 비롯해 이시영, 신익희, 
김창숙, 여운형 선생 등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16위 묘역이 조성돼 있는
민주주의의 성지길이다. 
둘레길 21코스를 걸으며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책임감 또한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4·19 민주묘지를 들어가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느덧 이제 마지막 코스만 남게 됐었습니다.
마지막 코스인 21코스에서 만나 뵙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