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둘레길 21코스는 북한산우이역에서 도봉산 입구까지 가는 코스로
'깊은 역사의 울림이 있는 길'이라는 테마로 연산군 묘,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묘 등 역사문화유적지와
세종이 아들의 묘를 찾아왔다가, '약수터의 물을 마시고 좋고 풍광 좋은 이곳은
아무런 근심 없는 곳'이라 하여 유래되었다는 무수골과
천년고찰 도봉산 도봉사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또한, 북한산 둘레길 20코스 왕실묘역길과 19코스 방학동길이 겹치는 구간으로
우리의 역사와 이야기를 알차게 담은 역사 문화의 길이다.
서울 둘레길 21코스 북한산 도봉코스는 7,3km로 약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서울 둘레길 21개 코스
▶서울 둘레길 21코스 안내도
오늘의 코스는 북한산우이역 - 연산군묘 - 정의공주 묘 - 쌍둥이 전망대 - 무수골 - 도봉사 -
도봉지원탐방센터 - 도봉산역 - 서울의 숲 순으로 이어간다.
서울 둘레길 21코스를 가기 위해서는 북한산우이역 1번 출구로 나와
뒤돌아서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우이동 고개 옆으로 스탬프 함이 있다.
서울 둘레길 21코스는 북한산 둘레길 왕실묘역길과 함께한다.
나무 계단을 시작으로 마지막 코스의 여정을 떠나 봅니다.
얼마 안 가서 좌측으로 휴식 공간이 주어지며 여기는 패스한다.
계단을 내려서면서 묘 1기가 보인다.
정경부인이라 칭함을 받은 전주 최씨 부인 묘라고 한다.
정경부인이라면 꽤 높은 직위인데
후손들이 어째......
▶정경부인
정경부인은 남편의 고신에 따라 주어지며, 문무관의 처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으며,
만인의 존경을 받던 지위였다 한다.
정1품의 관직에 있는 사람의 아내에게는 '정경부인'이란 봉작을 주었고
그 외 남편의 직위에 따라 부부인, 정부인, 숙부인 따위의 품계가 있다고 한다.
정1품(正一品)은 18개의 품계에서 제일 높은 등급이며 오늘날의 총리급에 해당한다고 한다.
길을 내려서면서 우측으로 원당마을로 들어선다.
원당마을.
연산군 묘 재실.
▶원당샘 공원
원당샘은 600여 년 전 파평윤 씨 일가가 자연부락인 원당마을에 정착하면서 이용하였다고 하며,
마을 이름을 따서 원당샘으로 불리고 수 백 년 동안 생활용 수로 공급되었다.
그러나 2009년부터 물이 흐르지 않아 2011년 지하수를 연결하여 원당샘이 마르지 않고
흐를 수 있도록 복원하였으며, 북한산둘레길과 인접되어 있어 주민과 등산객의 왕래가
빈번한 곳으로써 원당샘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하게 되어 연산군묘 및 은행나무와 함께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지는 새로운 도봉구의 문화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원당샘
600여 년 전부터 파평 윤 씨가 이 마을에 집단 거주하면서 그들의 생활용 수로 사용하였다.
원당샘은 수량이 풍부하여 심한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고
일정한 수온을 유지하여 혹한에도 얼어붙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도시화가 진행되고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섬에 따라 샘의 수량이 급격히 감소하여
2009년에는 급기야 물이 흐르지 않게 되었다.
현재는 땅속 깊은 곳을 흐르는 지하수를 끌어올린 후 흘려보내고 있다고 한다.
▶방학동 은행나무
서울시 지정보호수 1호에서 2013년 서울시 기념물 33호로 상향 지정하였다.
방학동 은행나무는 마을이 생기면서 600여 년 전부터 원주민들의
식수로 사용하던 원당샘이 있어 일정한 수량과 수온을 유지해
은행나무가 천년을 버티고 있다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고 한다.
1990년대 말 이후 매년 정월대보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연산군 묘 입구.
이 묘역에는 총 5기의 묘가 있는데,
최상단에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 씨의 묘가 쌍분 형태로 조성되어 있고,
최하단에는 연산군의 사위 능양위 구문경과 휘순 공주의 묘가 있으며
그 사이에 단독으로 조성된 의정궁주 조 씨의 묘가 있다.
▶연산군과 부인 신 씨 묘
조선의 제10대 왕인 연산군은 성종의 맏아들 이융이다.
물 깊고 넓을 '융'인데 이름과는 먼 생을 살았던 것 같다.
어머니는 관봉상시사 윤기견의 딸인 폐비 윤 씨이다.
폭군의 대명사인 연산군. 그는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 두 차례의 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비롯한 문신들을 대거 처형하고 언론 활동을 억압했으며,
당시 사대부들의 윤리관에 어긋나는 행동을 거듭하다가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인물이다.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 교동에서 그해 11월 병사했다.
1512년에 부인 신 씨가 묘를 강화도에서 이곳으로 옮겨줄 것을 요청하여
중종은 1513년에 양주군 해등촌(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으로 이전해
제사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곳에는 ‘연산군지묘’라고 적힌 석물 외에 아무런 장식이 없다.
연산군은 15대 광해군과 함께 조선 시대 폐주 가운데 한 사람이며,
《선원계보(璿源系譜)》에도 묘호와 능호 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묘역은 대군의 예우로 장례하여 곡장, 묘비, 상석, 장명등, 향로석, 문석인, 제실 등은
갖추어져 있으나 병풍석과 무석인, 석마, 석양 등은 없다.
▶의정궁주 조 씨
1422년 변계량의 건의로 태상왕 태종의 빈을 뽑기로 하여,
2월 28일 의정궁주 조 씨가 간택되었으나 태종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 해 5월 10일 태종이 죽자, 조 씨는 입궁하여 9월 25일 의정궁주가 되었다.
1453년 큰오빠 조순생이 계유정난 당시 안평 대군의 일파로 몰려 이듬해 죽임을 당하였다.
궁주 조 씨 또한 1454년 세상을 떠났다.
묘역이 위치한 땅은 본래 세종의 아들 임영 대군의 땅이었는데,
의정궁주의 제사를 임영 대군이 맡도록 하여 이곳에 궁주를 안장하였다고 한다.
묘역은 묘비와 상석, 문석인이 배치되어 있으며
유일하게 병풍석이 마련되어있다.
▶구문경과 휘순공주의 묘
연산군의 장녀 휘순공주와 사위구문경의 묘이다.
묘역은 묘비가 각각 있고, 상석, 향로석, 문인석 등의 석물과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망주석과 장명등 등이 갖추어져 있다.
재실로 가는 길.
재실 내부의 모습.
연산군 묘를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정의공주묘로 이어간다.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
조선 세종의 딸인 정의공주와 부군 안맹담의 묘역이다.
이들은 1428년에 결혼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982년 11월 13일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 공주 묘역이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좌측이 양효공 안맹담의 묘이고, 우측이 정의공주의 묘이다.
▶양효공 안맹담
안맹담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명문가 출신으로, 1428년(세종 10) 정의 공주와 혼인,
부마가 되어 죽성군에 봉해지고, 1432년(세종 14)에 연창군에 봉해졌다.
평소 초서에 능하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였으며,
음률에도 통달하였다고 할 정도로 풍류에 밝았다고 한다.
불교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1462년(세조 8)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이듬해 2월 25일 양주 도봉산 해촌동(海村洞) 묘원에 묻혔다.
안맹담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양효공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양’은 온화하고 선량하다는 의미이며, ‘효’는 어질고 은혜롭게 어버이를 섬겼다는 의미이다.
▶정의공주
조선 제4대 왕 세종과 정실 소헌왕후 심 씨의 8남 2녀 중 셋째 자녀이자 적차녀이다.
위로는 언니 정소공주와 큰 오빠 조선 5대 왕인 문종의 누이동생이자 세조의 누나이다.
아래로는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을 비롯하여 7명의 남동생이 있다.
1424년 첫째인 정소공주는 겨우 13살 때 병으로 죽어,
이후 26년간 실질적으로 세종의 장녀이자 유일한 적녀로
아버지 세종대왕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1477년(성종 8) 별세하여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양효공 안맹담 신도비
양효공 안맹담 신도비는 1466년(세조 12) 후손들이 안맹담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화강암으로 된 비로, 높이 190㎝, 너비 170㎝, 두께 280㎝, 비신은 대리석으로
높이 190㎝, 너비 90㎝, 두께 26㎝이다.
안맹담의 사돈인 하동 부원군 정인지가 지었으며 글씨는 안맹담의 넷째 아들 안빈세가 썼다 한다.
정의공주 묘 옆으로 둘레길은 이어진다.
사천목씨 재실.
▶사천목씨(泗川睦氏)
사천 목씨는 처음 당나라에서 우리나라에 파견되어 온 학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나
목충(睦沖)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목효기를 시조로 한다.
고려 시대에는 목충, 목인길, 목자안 등이 왜구 평정에 공을 세웠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선조 대에 대사간·도승지를 지낸 목첨, 효종 대 지중추부사를 지낸
목서흠, 호조참판·도승지를 지낸 목장흠, 예조참의를 지낸 목대흠,
숙종 대 좌의정을 지낸 목내선 등이 고관으로 이름을 드높였다.
사천 목씨 묘역에는 한성 판윤 목진공, 목서흠과 두 손자 목임기, 목임일,
목임일의 아들 목천현의 묘 및 6기의 비석이 있다.
서울특별시문화재 기념물 제27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계단을 올라 다시 숲길이 이어진다.
이곳은 멧돼지 방어용 철책이며 철책문을 열고 나가서 다시 "꼭" 닫아줘야 한다.
문기둥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걸로 보아 옛날 집터인 것 같다.
원통사로 올라가는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다리를 건너 둘레길은 이어진다.
원통사로 해서 우이암으로 이어지는 능선 삼거리 도착.
숲사이로 장엄한 도봉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주의가 필요하다.
자칫 밑에 길로 가면 쌍둥이 전망대를 그냥 지나칠 수 있다.
길을 가다 보면 숲에 가려 쌍둥이 전망대가 잘 보이지 않는다.
▶쌍둥이 전망대
포토죤과 함께 북한산과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의 수려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똑같은 모양의 두 개의 전망대가 서로 마주 보고 있어 쌍둥이 전망대라 한다.
서울 둘레길 19코스에 있는 흰구름 전망대와 흡사하다.
쌍둥이 전망대는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이 구분되어 있다.
쌍둥이 전망대 상부의 모습.
파노라마.
북한산 인수봉과 백운대.
▶북한산
세계적으로 드문 도심 속의 자연공원인 북한산국립공원은
1983년 우리나라 15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76.922㎢로 우이령을 경계로 하여 북쪽으로는 도봉산 지역,
남쪽으로는 북한산 지역으로 나뉜다.
북한산국립공원은 화강암 지반이 침식되고 오랜 세월 풍화되면서
곳곳에 깎아지른 바위봉우리와 그 사이로 흘러내리는 아름다운 계곡들을 이루고 있다.
또한, 2,000년의 역사가 담긴 북한산성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 문화유적과
100여 개의 사찰, 암자가 위치하여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함과 동시에
역사 문화 학습의 장이 되고 있다.
우이암과 밑으로 보이는 원통사.
▶우이암
우이암의 명칭은 봉우리의 모습이 소의 귀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본래는 바위의 모습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관음보살을 닮았다 하여 관음봉이라고도 하고,
사모관대를 쓰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사모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해발 542m의 우이암은 도봉산의 대표적인 암봉 가운데 하나로,
매우 급경사를 이루면서 형성되어 있는데 산 정상부 쪽은 거의 수직 절벽에 가깝다.
우이암은 암벽 등반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 지금도 암벽 등반을 하고 있다.
장엄한 도봉산의 모습이다.
▶도봉산
도봉산은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온 한북 정맥에 속하며 예로부터 서울의 진산으로
사랑받아 왔으며 산 전체가 웅장한 바위로 이루어져 드높은 화강암 벽이 흰 빛을 뽐내며
공중에 솟아 변함없는 지조와 의리의 상징으로 서울을 굽어보고 있다.
도봉산의 최고봉인 자운봉이 망월사 뒤편에 위치하고 있고, 천축사 뒤편에 위치한 만장봉,
바위 봉우리가 기둥처럼 솟아있는 주봉, 그밖에 선인봉, 오봉 등이 연이어 있어,
승천하는 용의 기세 같기도 하고, 혹은 거북 모양 같기도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불러일으키는 명산으로 천만 서울 시민이 즐겨 찾는 휴식처이다.
파노라마.
수락산의 모습.
불암산의 모습.
밑에서 본 쌍둥이 전망대.
방학동에서 도봉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방학동 유래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목 해등촌면 지역이었고, 1914년 노해면 방학리로 되었다.
1963년 서울시 성북구에 편입되면서 방학동으로 되었고 1973년 도봉구 관할로 되었다.
1975년 도봉동에서 분동 되었으며 1980년 방학 1, 2동으로 분동,
1988년 2동이 다시 2, 3동으로 분동 되었고 1994년 3동이 4동으로 분동 되었다가
2008년에 4동이 3동으로 통합되었다.
현재 법정동인 방학동은 행정동인 방학 1∼3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좁은 고갯길을 따라 도봉동으로 넘어간다.
무수골계곡을 따라 방학동길이 끝나고 도봉산옛길로 들어선다.
세일교 다리를 건너 맞은편으로 넘어간다.
▶무수골녹색복지센터
도봉산 자락에 산림 치유 공간인 ‘무수골녹색복지센터’가 문을 열었다.
신록이 우거진 자연 속에서는 특별하게 활동을 하지 않아도 절로 힐링이 되는 느낌을 받는다.
누구나 녹색 힐링 공간을 향유할 수 있도록 도봉산 자락에 산림 치유 공간
‘무수골 녹색복지센터’를 지상 1층 2개 동으로 2024년 7월 3일 개관하였다.
▶무수골
아무 걱정·근심이 없는 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의 무수골은
1477년(성종 8) 세종의 9번째 아들 영해군 묘가 조성되며 세종이 아들의 묘를 찾아왔다가,
"약수터의 물을 마시고 좋고 풍광 좋은 이곳은 아무런 근심 없는 곳"이라 하여 유래되었다고 한다.
무수골은 그린벨트 내에 있어 특히 도심에서 볼 수 없는 친환경 농법으로 벼농사를 하고 있다.
모내기와 추수, 탈곡 등 체험행사를 볼 수 있으며 주말농장으로
신선하고 안전한 먹을거리를 맛보는 재미가 있다.
서희 커피숍.
마중물교회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소속으로
마치 전원 속에 카페 같은 느낌이 든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느낌도 우아하고 아늑한 카페 같은 분위기가 연출된다.
마중물이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더니
'펌프질을 할 때 물을 이끌어 올리려고 위에서 붓는 물'을 말하며
순수한 우리말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땅속에 있는 많은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마중 나가는 물이다.
도봉산옛길로 들어선다.
알 수 없는 표지석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정도 규모의 유명 인사였으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표지판이 설치되어야 할 텐데
그런 표지판은 없고 표지석에 새겨진 한문은 내가 설명하기엔 무리인 것 같다.
이제 마지막 계단을 올라간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 데크길을 따라가면 도봉산으로 이어지는 길과 만나게 된다.
길을 따라 도봉사로 내려간다.
천년고찰 도봉산 도봉사.
포대화상.
▶도봉사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 조계사 소속 사찰로
고려 시대인 968년(광종 19)에 혜거 국사가 창건하였으며,
971년(광종 22) 광종이 여주 고달사와 희양산 봉암사, 양주 도봉사 세 곳을 특별 선원으로 삼았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으로 왕이 남쪽으로 피난하면서 도봉사에 들렀던 적이 있다.
이후 도봉사는 전쟁과 화재 등으로 여러 번 소실되었으며, 그 내력은 잘 알 수 없다.
조선 말 고종 때 승려 벽암이 법당과 부속 건물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렀다고 한다.
미륵전.
뿌리탑.
대웅전.
도봉산탐방지원센터로 내려간다.
능원사 일주문.
▶능원사
능원사는 사찰의 모든 전각이 화려한 금단청을 자랑하며,
화려한 무늬로 도봉산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현 위치에 30년 넘게 자리하고 있는 능원사는 이동기 단청 장인의 손을 거쳐
황금단청이 돋보이는 사찰로 거듭났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불교 종단에 등록된 18개 종단에 속하지 않는 단독 사찰로
따로 신도 관리나 법회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능원사를 지날 때마다 신도는 보이지 않고 목탁 소리도 듣지 못했다.
용화전이 본당으로 미륵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다고 한다.
용화전.
이와 비슷한 대한 불교조계종소속으로 한국의 황금사찰로 유명한 수국사가 있다.
도봉산 입구에 도착한다.
도봉산 입구 뒤에 있는 '도봉동문'.
▶도봉동문
이 바위에 새겨진 글씨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글씨라고 한다.
한학을 연구하는 후학들의 이정표이며, 학문의 중심이었던 도봉서원의 전당에 들어섬을 알려주고
또한 도봉산의 입구임을 알려주는 의미를 부여한다고 한다.
도봉산에 산재하는 다양한 바위에 새긴 글 중 첫 번째로 만나 볼 수 있는 유명한 글이다.
▶북한산생태탐방원
2011년 개원한 국립공원 최초의 생태체험시설인 국립공원공단 북한산생태탐방원이 있다.
북한산의 우수한 생태환경과 문화자원을 활용해 국민에게 힐링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기관이다.
'자연을 배려하는 산행 교실'과 청소년 대상 '자연캠프', '외래 식물 제거 활동' 등
다양한 자연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도봉산탐방지원센터가 보인다.
도봉산탐방지원센터옆 초라한 스탬프 함.
인증을 하고 마무리합니다.
여러분들도 여기까지 따라오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또,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날지는 모르지만
그동안 건강하시고 안전한 산행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안녕~^^
이것으로 서울 둘레길 21코스를 오늘로써 완주하였다.
자연이 선물하는 쾌적한 숲길은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며
완주의 즐거움은 보너스를 얻는 기분이다.
특히 아직도 기억에 남아 아쉬움으로 맴도는 안양천 길은 다가오는 가을과
내년 봄에 다시 걷고 싶은 길이다.
시기를 잘 맞추면 가을 단풍과 봄철 벚꽃의 화려함이 상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맴돈다.
서울 둘레길 2.0은 많은 보완이 되었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아직도
지속적인 보완이 요구되며 코스 또한 조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순간은 나중에 당신 인생의 가장 좋은 추억이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마음껏 즐겨라.
탈무드에 나오는 말이다.
그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다음은 한양 도성길이며 끝나면 걷다가 만 양평 물소리길도
마저 걸어야 하고 가을이면 왕릉 촬영과 숲길도 걸어야 한다.
시간은 이렇게 바쁘게만 지나가는데 할 것은 많고 괜스레 마음만 바빠진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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